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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마당/김효숙의 마천골이야기

한땀 한땀 명품 가죽신을 만드는 장인 화혜장, 황해봉

by 이치저널 2022.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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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숙 zeta61@hanmail.net

 

한국의 전통신을 ‘화혜’라 하는데, 화혜장은 목이 있는 신발인 화와 목이 없는 신발인 혜를 제작하는 장인을 통칭해 붙인 이름으로, 순우리말로는 ‘갖바치’로 부른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16호 화혜장 황해봉

 

 

마천금호어울림1차아파트 위치한 사거리에서 마천중앙시장 쪽으로 올라가는(마천로 51길) 초입 왼쪽으로 화혜장 전수관이라는 간판을 볼 수가 있다. 
시장을 오가면서 ‘화혜장 공방’ 아래 그려진 예쁜꽃신을 지나치면서 본기억이 있어 우리동네에 국가무형문화재 제116호로 지정되신 분이 살고 계신다는 반가움에 무작정 연락 없이 공방을 방문했다.

인기척에 나온 아드님(황덕성)에 따르면 황해봉 화혜장님은 늘 상주하고 계시는 것은 아니란다. 20여년전에 마천동에 자리잡고 작업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작품제작이 있을때는 공방에 계시지만 일이 없을  때는 남영주에 거주하신다고 한다. 직접 만나서 작업과정과 인터뷰를 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서면 인터뷰와 받은 자료을 토대로 ‘화혜장’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한국의 전통신을 ‘화혜’라 하는데, 화혜장은 목이 있는 신발인 화와 목이 없는 신발인 혜를 제작하는 장인을 통칭해 붙인 이름으로, 순우리말로는 ‘갖바치’로 부른다.

 

적석청석

 

가죽신인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신의 대부분을 서양 구두가 차지함에 따라 갖바치의 명맥도 거의 끊겼다. 그러나 전통신을 만드는 것은 가죽을 주재료로 하여 수십 번의 제작공정을 거쳐 고도의 기술과 숙련된 장인의 솜씨로 완성되는 것이기에 문화재청은 전통신을 만드는 장인 곧 ‘화혜장’을 국가무형문화재 제116호로 지정하여 전승을 지원하고 있다. 

그 유일의 ‘화혜장’ 황해봉 장인의 집안은 대대로 신을 만들어왔다. 그의 할아버지는 근대 이후 최초의 화혜장이자 3대째 가업을 이어간 조선 왕실의 마지막 ‘화장’인 황한갑(중요무형문화재 제37호 1889~1983)선생으로 고종황제의 적석(왕이 의례 때 신는 신발)을 직접 제작했다.

고종과 엄비 등 왕가의 신을 만들던 조선왕조 최후의 왕실 갖바치였고 전성기는 조선시대 말엽 신분제가 무너지면서 꽃신 주문이 줄을 잇던 때였다. 최고의 장인으로 지냈던 시절은 갑오개혁 이후 고무신과 구두의 범람으로 설자리를 잃고 말았다. 

 

태사혜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전통 신을 찾는 사람이 급격히 줄어 황한갑 장인은 돌쟁이 아기들이 신는 꽃신을 만들며 명맥을 유지했고 찾는 사람이 없다 보니 전수 받겠다는 사람도 없어 손자인 황해봉 선생이 1973년 군 제대 후부터 본격적으로 기술을 전수받았다. 

10년 세월동안 조부의 기술을 고스란히 물려 받은 황해봉 선생은 1983년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 1990년대부터 사라진 전통 신을 재현하고 복원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조선시대 신발의 종류만 스무 가지가 넘고, 할아버지께 전부 배우지는 못했기 때문에 유물이나 문헌을 연구해 그대로 복원하기 시작, 조선시대 왕과 왕비가 의례 때 신던 적석(임금이 정복을 입을 때 신는 신)과 청석(황후가 예복에 착용한 푸른 비단으로 만든 신)을 되살려 냈고,  문무백관들이 관복에 신던 ‘목화’는 고구려 벽화를 보고 재현했다. 99년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을 받았고, 2004년 중요무형문화재 116호 화혜장으로 인정돼 갖바치의 맥을 잇고 있다. 

 

목단수혜, 십장생수혜

 

황해봉 화혜장은 거의 모든 종류의 전통 신발을 짓는다. 대표적인 게 꽃신이라 불리는 ‘수혜’이다. 꽃신은 전통 신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신발이다. 주로 사대부 여인들이 신었는데 비단에 십장생.매화.목단 등의 수를 놓아 만든다. 양반 남성들이 평상복에 신던 ‘태사혜’, 관리들이 제복에 신던 ‘흑혜’, 사대부 여인들이 신던 ‘당혜’와 ‘운혜’도 제작한다.

 

 

전통신발의 가장 큰 특징은 좌우 구분이 없고 신발을 신다보면 발모양에 맞게 형태가 잡히는데 이것을 ‘발집이 잡힌다’라고 한다. 처음 신을 신을 때는 조금 불편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오른쪽 왼쪽이 구별되고 발도 편해진다. 신발 하나를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최소 사을 길게는 열흘이 걸리고 신발 한짝을 만드는데 무려 72가지 공정이 들어간다.

마지막까지 전통 신을 놓지 않았던 할아버지 황한갑 장인처럼 선생은 우리나라 유일의 화혜장으로서 외로운 길을 걷고 있다. 이제는 그의 아들이 6대째 가업을 잇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전통에 무관심하고 일제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들여온 고무신이나 짚신을 전통 신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우리전통 신발에 대한 무관심이 가장 가슴 아프고, 언제가 우리 전통 신발을 한자리에 모은 ‘꽃신 박물관’을 세우는게 선생의 꿈이라고 한다. 

 

우리동네에 있었음에도 무심코 지나치며 ‘화혜장’이란 단어가 낯설었던 것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고, 전통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부족한 이유이기도 했으리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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