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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마당/민병래가 만난 사람들

적정기술 보급하는 활동가, 이승석

by 이치저널 2022.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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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래 pmsigni@hanmail.net

 

 

제초기 '굴려유, 댕겨유' 개발자
서서 모종 심을 수 있는 파종기 개발
1세대 벤처기업가에서 적정기술 활동가로

 

 

 

 

"보수는 없는데 돈 쓰고 시간 쓰는 일"

 

 

1964년생 이승석, 이제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 때문인가 이래 저래 생긴 직함이 많다. 충남적정기술협동조합연합회장, 충남적정기술공유센터장, 충남사회경제연대 상임대표 등등. 맡은 직책은 무언가 대단해 보이지만 그의 말대로 "보수는 없는데 돈 쓰고 시간 쓰는 일"들이다.

이승석은 90년대 초 1세대 벤처기업에서 일하다 1997년 충남 예산군으로 귀농했다. 지금 그는 25년 경력의 농부이면서 적정기술을 보급하는 활동가로 살고 있다. 도대체 '적정기술'이 뭐길래 그 긴 이름을 달고 전도사를 자처하는 걸까?

 

 

농사 10년에 망가진 몸

 

충남적정기술협동조합연합회장 이승석

 

33살 나이에 귀농해 10년이 되어가던 2007년 어느 날, 이승석은 밭에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간다.

그는 농사 첫 해, 2500평 되는 땅에서 고구마 농사를 지었다. 수확은 풍성했지만 온 나라에 고구마가 넘쳐나 똥값을 받았다. 그해 수입은 놀랍게도 80만 원. 그래도 버티면서 예산의 농부답게 사과를 포함 여러 작물을 키웠다. 하지만 농약에 중독되어 어느 날부터 냄새를 맡으면 몸에 경기가 일고 약을 칠 때가 되면 식은 땀이 흘렀다. 그렇게 젊은 농부, 초보 농부의 고생은 컸고 시나브로 몸이 망가졌던 것이다.

병원에서 내린 진단은 으스스했다. 삶의 기로에서 이승석은 '몸살림운동'을 접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몸에 대해 탐구하며 열 개 안팎의 기본동작을 열심히 했다. 다행히도 디스크는 몸살림운동만으로 잘 회복되었다. 그후 그는 몸살림운동 전파에 나섰다.

그의 노력 덕에 예산에서 여러 개의 몸살림운동 동아리가 만들어졌다. 그는 다른 지역의 마을공동체, 대안학교, 시민운동단체도 찾아다니며 몸의 인문학을 강의했다. 몸을 회복하면서 이승석은 '몸살림' 외에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농촌을 둘러보니 아프지 않은 이가 없었다. 허리는 휘고 뼈마디는 뒤틀리고 나이든 어르신들이니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는데 그게 아니었다. 기계를 쓰지 않는 소농들은 모를 심건 김을 매건 쪼그려 앉고 허리를 굽혀 긴긴 날을 일했고 그게 수십 년 동안 쌓였으니 허리와 무릎이 버텨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승석은 "앉아서 농사 짓지 않고 서서 일할 수 있는 농기구를 만들자, 석유나 전기를 쓰지 않으면서 입식농법이 되게끔 농기구를 개발하자. 이게 농민을 살리는 길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바로 적정기술, 적정도구에 대해 눈을 뜬 것이다.

 

 

국내 최초 농부들의 농기구 협동조합을 만들다

 

이승석은 이 깨달음을 동네 선후배들에게 털어놓았다. 그는 '적정기술'을 지역의 힘, 공동체의 힘으로 풀어보고 싶었다. 공감은 하지만 '적정기술, 적정도구를 만들자는 제안'은 낯설고 뜬금 없었다.

 

꼼지락 협동조합의 대장간 이승석의 집 한 켠에 있는 대장간, 조합원들이 만든 적정도구들이 전시되어 잇다. ⓒ 민병래

 

"우리가 땅만 팠지 도구를 만들어봤나? 도면도 그리고 설계도 해야 하는데 그걸 누가 해?"
"기구를 만들려면 샘플도 필요한데 그걸 어디서 만들어?"
"예산 촌구석에서 무슨 자연에너지야, 그건 서울에서나 생각할 일이지."

이승석은 인내심을 갖고 "형님 한번 해봅시다, 동생들 한번 해보자"라며 주변을 설득했다. 신양마을은 유독 청장년 농부들이 많았다. 그렇게 열명 남짓이 손을 맞잡고 2015년 농기구전문 협동조합 '꼼지락'을 만들었다. 그의 집 한 켠에 대장간을 짓고 화덕 하나, 모루, 망치 몇 개를 갖고 시작했다. 그렇게 힘을 합쳐 세상에 처음 선보인 게 제초기 4종 세트다.

꼼지락에서 만든 이 제초기는 계절에 따라 제초 방식을 달리하는 4개가 한 묶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봄철 어린 풀은 살살 굴리는 방식으로(굴려유), 20cm 이상의 풀은 당기는 방식으로(댕겨유), 그리고 가을 장마 이후의 풀은 줄기를 치는 방식으로 세분해 4종을 만들었다.

모두 서서 작업할 수 있고 예초기와 달리 전기나 기름을 쓰지 않기에 소농이나 주말 농부, 초보농부에겐 그야말로 적정한 도구였다. 시제품 사용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려 입소문이 난 탓도 있지만 출시 첫날 세트당 가격이 10만 5천 원임에도 156개의 주문이 들어왔다.

또 서서 모종을 심을 수 있는 세 가지 종류의 파종기를 개발했다. 가볍고 빠른 작업이 가능해 많은 관심과 구입 문의를 받고 있다. 얼마 전에는 밭을 일구는 가제트 쟁기, 파워쟁기의 시제품이 나와 내년 봄에는 정식 제품을 낼 계획이다.

 

​연합회에서 만든 파워쟁기 땅을 갈고 흙을 엎을 수 있는 게 한꺼번에 이뤄지는 쟁기다 ⓒ 민병래

 

이승석과 '꼼지락'은 이렇듯 약 30개 정도의 적정 농기구를 한 해에 세 개씩 10년에 걸쳐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 되면 300평 정도를 지닌 소농들이 기름 한 방울 쓰지 않고 몸을 해치지 않으며 농사를 짓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계에 소질이 있어 이런 일을 벌이는 걸까? 아니다. 그는 외려 기계치에 가까웠다. 잠시 서울 구로 3공단의 영진 파일을 다닌 적이 있지만 섬유공장이었다.

이승석은 "깊이 관심을 가지면 길이 열린다. 길을 가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고물상을 뒤져 이런저런 부품을 가져다 대장간에서 꼼지락 꼼지락 두들겨본다. 더디더라도 꾸준히 하면 된다"라고 말한다. 정성을 기울이면 된다는 말이지만 이런 개발과정에는 그가 정독대학교 2년제 철학과를 다닌 게 큰 보탬이 되었다.

그의 가족은 전북 부안에서 1960년대 중반 서울 청량리역 근처로 이사했다. 아버지가 이발소를 차리려고 기술을 배워 가게를 계약했는데 사기를 당했다. 상심한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보냈고 이승석은 어린 나이에 엄마와 함께 옥수수를 찌고 강정을 만들어 경동시장 한켠에서 팔았다.

그런 가난을 잡아준 게 글쓰기와 독서. 이승석은 중학교 2학년 때 백일장에 나가 상을 받은 문학소년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시인 이상과 김수영을 흠모했고 따분한 교과서 대신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을 읽었다. 교사들은 책을 빼앗고 벌을 주었다. 이승석은 학교생활을 못 견뎌 2학년 때 자퇴하고 출가를 결심한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대흥사 큰 스님 말씀에 발길을 돌렸고, 페인트공, 전기기사, 건설공사장 잡부 등으로 일을 했다. 지친 몸으로 돌아와 세상을 탐구하려 책을 폈지만 쏟아지는 잠을 견딜 수 없었다. 대학 진학을 생각했지만 집안 형편상 포기하고 대신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정독도서관을 다녔다. 스스로를 '정독대학교 학생'이라 부르며 2년 동안 문을 열 때 들어가 문을 닫을 때 나왔다.

이때 불교와 노장철학, 칸트와 스피노자, 데카르트의 책을 읽었다. 헤겔과 맑스의 저작에 빠졌다. 동서양을 넘나들고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시간이었다. 어려운 문장은 한줄 한줄 베껴가며 음미했다. 점심은 백 원짜리 삼립빵과 우유 하나, 큰 선생들에게 배우니 배는 고파도 정신은 풍족했다.

제초기와 파종기를 만들 때 이 시절에 키운 탐구 능력이 보탬이 되었다.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도면을 그렸고 오픈 소스를 찾아 설계에 반영했다. 몸살림운동을 하면서 인체를 연구한 것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도구를 만든 것이다.

이승석과 '꼼지락'은 이렇듯 약 30개 정도의 적정 농기구를 한 해에 세 개씩 10년에 걸쳐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 되면 300평 정도를 지닌 소농들이 기름 한 방울 쓰지 않고 몸을 해치지 않으며 농사를 짓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계에 소질이 있어 이런 일을 벌이는 걸까? 아니다. 그는 외려 기계치에 가까웠다. 잠시 서울 구로 3공단의 영진 파일을 다닌 적이 있지만 섬유공장이었다.

이승석은 "깊이 관심을 가지면 길이 열린다. 길을 가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고물상을 뒤져 이런저런 부품을 가져다 대장간에서 꼼지락 꼼지락 두들겨본다. 더디더라도 꾸준히 하면 된다"라고 말한다. 정성을 기울이면 된다는 말이지만 이런 개발과정에는 그가 정독대학교 2년제 철학과를 다닌 게 큰 보탬이 되었다.

그의 가족은 전북 부안에서 1960년대 중반 서울 청량리역 근처로 이사했다. 아버지가 이발소를 차리려고 기술을 배워 가게를 계약했는데 사기를 당했다. 상심한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보냈고 이승석은 어린 나이에 엄마와 함께 옥수수를 찌고 강정을 만들어 경동시장 한켠에서 팔았다.

그런 가난을 잡아준 게 글쓰기와 독서. 이승석은 중학교 2학년 때 백일장에 나가 상을 받은 문학소년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시인 이상과 김수영을 흠모했고 따분한 교과서 대신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을 읽었다. 교사들은 책을 빼앗고 벌을 주었다. 이승석은 학교생활을 못 견뎌 2학년 때 자퇴하고 출가를 결심한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대흥사 큰 스님 말씀에 발길을 돌렸고, 페인트공, 전기기사, 건설공사장 잡부 등으로 일을 했다. 지친 몸으로 돌아와 세상을 탐구하려 책을 폈지만 쏟아지는 잠을 견딜 수 없었다. 대학 진학을 생각했지만 집안 형편상 포기하고 대신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정독도서관을 다녔다. 스스로를 '정독대학교 학생'이라 부르며 2년 동안 문을 열 때 들어가 문을 닫을 때 나왔다.

이때 불교와 노장철학, 칸트와 스피노자, 데카르트의 책을 읽었다. 헤겔과 맑스의 저작에 빠졌다. 동서양을 넘나들고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시간이었다. 어려운 문장은 한줄 한줄 베껴가며 음미했다. 점심은 백 원짜리 삼립빵과 우유 하나, 큰 선생들에게 배우니 배는 고파도 정신은 풍족했다.

제초기와 파종기를 만들 때 이 시절에 키운 탐구 능력이 보탬이 되었다.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도면을 그렸고 오픈 소스를 찾아 설계에 반영했다. 몸살림운동을 하면서 인체를 연구한 것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도구를 만든 것이다.

 

 

충청남도를 적정기술의 성지로

 

이승석은 한편 충남 각지의 적정기술 활동가들과 함께 충남적정기술 협동조합 연합회를 만들었다. 충청남도를 적정기술의 성지로 만들자고 온 나라에 적정기술을 보급하자고 뜻을 모았다. 충남도청도 이에 호응, 지원조례도 만들고 5개년 종합계획까지 세웠다.

2018년에는 환경부가 자금을 대고 충남도청이 부지를 제공, 충남농업기술원 내에 건평 130평의 적정기술 공유센터가 지어졌다. 이승석이 대표를 맡았는데 센터는 활동가들과 조합의 연대사업을 위한 공간이기에 급여 없는 자원 봉사직이었다. 어쨌든 센터라는 근거지가 생겨 여러 활동가들이 모이니 혁신적인 도구들이 잇달아 만들어졌다.

첫 번째가 태양광 예초기, 태양광 패널과 배터리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한 제품이다. 아직은 시범용이지만 성능이 좋다. 기름을 사용하지 않으니 냄새도 안나고 바퀴를 달면 누구나 편하게 쓸 수 있다. 센터에 합류한 대안에너지기술연구소 강신호 박사의 작품이다.

또 최근 심혈을 기울인 게 종이모판이다. 지금까지 육묘용 모판은 모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모를 심고 나면 그냥 태워졌다. 비닐하우스 폐비닐 못지않게 농촌에서 골치덩어리인 쓰레기였다. 이승석과 활동가들은 이를 대체할 종이그릇, 종이모판을 만든 것이다. 이를 수동이식기를 통해 땅에 심으면 1분당 264개의 모종을, 뿌리도 안 다치게 심을 수 있다. 종이그릇은 생분해되니 생산성과 환경 모두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적정기술, 적정도구인 셈이다.

 

플라스틱 모판을 대신한 종이모판 종이모판은 생분해되어 환경에 좋다. ⓒ 민병래

 

이런 혁신성은 바로 적정기술 활동가들이 농부이고 경험에 바탕을 두고 개발했기에 가능했다. 또 이승석이 목소리 높이는 '기술공유제' 정신도 한몫했다. 그는 모든 설계도면을 공개한다.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고 상업적 이용도 반대하지 않는다. 주변에선 남 좋은 일 시킨다고 탓하지만 '기술공유' 정신이 '적정기술' 정신과 협동조합이라는 '사회적 경제' 정신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승석은 예산에서 2014년에 햇빛촌 농원을 세운 적이 있었다. 여기서 자연콩을 전통옹기에 3년 묵혀 토속된장을 만들었다. 또 어죽, 삽교곱창과 함께 예산의 3대 음식이었던 예산집장을 복원했다. 이 장은 예산의 양반가에서 먹던 된장으로 즙장(汁醬) 혹은 채소를 많이 넣었다고 채장(菜醬)이라고도 불렸다. 한우양지머리에 말린 새우, 거기다 메주콩, 보리, 찹쌀 등 여러 곡물과 채소를 넣고 간장으로 맛을 맞추는 향토색 진한 음식이다. 전골에 넣고 끓이거나 비빔밥에 넣고 버무리면 맛이 일품이다.

이승석은 이런 다양한 노력과 경험을 (그의 표현을 빌면) '시절인연'에 따른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 '시절인연'으로 충남사회적경제연대 대표까지 맡게 되었다. 그는 적정기술을 마을과 협동조합의 힘으로 풀었다. 그렇기에 충남의 마을기업, 자활기업, 사회적기업과 연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주변의 강력한 추천으로 받아들인 대표직. 이래저래 돈 안 되는 데 시간 쓰고 몸 쓰는 게 그의 팔자인가 보다.

 

 

"개망초처럼 살고 싶다"

 

이승석은 지금 가족과 떨어져 산다. 아내는 서울 강북구에서 교사를 하고 있고 딸 가을이는 홍성에서 대안학교인 풀무학교를 다닌다. 주말에는 만나지만 일정이 어긋나면 한 달에 한 번 볼 때도 있다. 그래서 마을에 있는 꼼지락 조합원들이 형제나 다를 바가 없다.

어느 날인가 공유센터에서 늦은 교육을 마치고 컴컴한 집에 들어갔을 때 마을 동생들이 형님 출출하면 먹으라고 산에서 두릅을 따다 데치고 전까지 부쳐놓아 놀란 적이 있었다.

예산군 신양면의 산비탈에 있는 그의 집 앞에는 개망초가 널려있다. 그는 개망초가
"누이처럼 소박하고 질긴 생명력이 있는 꽃. 어린 순은 나물로 무쳐도 좋고, 꽃잎은 밀가루 입혀 튀기면 맛도 좋은 꽃"이라고 말한다. 그는 개망초를 좋아한다. 그는 예산에서 충남땅에서 개망초처럼 살려 한다.

가다가 힘들 때는 열여덟 까까머리로 찾아간 해남 대흥사에서, 큰 스님이 들려준 "아직은 때가 아니다"란 말씀을 새기며 마음을 늦추고 걸음을 늦추려 한다.

 

 

적정기술은 특정한 지역의 사정에 맞는 과학기술을 뜻한다.

1960년대에 영국 경제학자 프리츠 슈마허가 거대기술이 아니라 환경친화적인 중간기술을 제안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고려되기 시작했고,

많은 지지자가 생겼다. 이들은 선진국에서 개발된 첨단 기술이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개발도상국의 주민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들 지역을 진정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여 적용하려 했다.

이들 기술은 주민들이 주체로 제작하고 작동할 수 있는 기술들로

지역 친화적, 환경 친화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게 기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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