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이 넘도록 연락 한번 없던 친구로부터 갑자기 저녁 한 끼 하자는 전화가 왔다. 너무나 고맙고 설렜다. 그러면서도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걸까? 나쁜 일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들뜬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제발 좋은 소식이기를 기대하며 산뜻한 발걸음으로 약속장소에 나갔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내가 받을 것이 있었는데 돌려주지 않고 연락이 끊긴 사람이라면 일이 잘되어서 그 물건을 돌려주겠다고 할까 하는 생각으로 기분이 좋고 행복한 상상을 하겠지만, 내가 신세 진 것이 많고 갚아야 할 것이 넘친 사람이라면 그 빚을 당장 갚으라고 독촉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앞서고 불편한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친구는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사업을 크게 벌이다 잘못되어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잠적을 했었기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었다. 만나보기 전까지는 지레짐작 넘겨짚을 필요가 없고 또한 서둘러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의 생각들이 떠올랐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하면 부담을 느낄까 하여 연락이 올 때까지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고 있던 친구였다. 핸드폰 번호가 바뀌어도 몇 번은 바뀌었을 긴 시간이 지났는데 용케도 나의 연락처를 알아내고 연락을 해왔으니 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할 일인가. 혹여 약속시간에 늦어 그 친구를 못 보면 어쩌나 하는 조급한 마음에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약속한 식당에서 친구를 보자마자 그동안의 안부를 물을 새도 없이 그의 안색과 옷차림새부터 스캔하고 있는데 ‘그냥 잘살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신세 진 것도 많아 편하게 저녁 한 끼 하고 싶어 보자 했다’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긴장했던 마음이 살짝 놓이니, 맛있는 음식을 실컷 멋들어지게 먹을 수 있었다. 이 한 끼 식사가 옛날 왕들이 먹던 산해진미 수라상보다 더 귀하고 배부른 저녁이었다.
더구나 고급진 안부에 그동안 끊어졌던 정과 웃지 못할 사연을 보태니 윤기가 자르르 흘러 한동안 배부름이 꺼지지 않았다. 주문한 음식의 값을 모두 지불했다고 하니 본전 생각이 나서 배가 불러도 꾸역꾸역 평상시보다 더 많이 먹었다.
뇌가 ‘그만 먹어’ 하기도 전에 너무 많이 먹어버렸을까? 한 입 먹고 한 입 쉬어야 하거늘 쉬지 않고 먹어댔으니 위도 무척 힘들어했다. 마음이 배부르고 기분이 배부르고 느낌이 배부르게 먹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마음도 입맛도 무시한 채 서둘러 나의 배만 채운 것은 아닌지 조금은 후회스러웠다.
음식끼리도 서로 잘 맞는 궁합이 있는 것처럼 누구와 함께 먹느냐에 따라 맛이 다르다. 똑같은 음식을 먹어도 먹은 듯 마는 듯 깨작거리지만 배가 거북하고 개운치 않은 때가 있고 넘치도록 맛있게 많이 먹어도 소화가 잘되기도 한다. 음식도 입으로만 먹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도 먹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손끝으로 양념하고 마음으로 버무리면 더 맛있는 음식이 될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멋있는 사람과 먹는다면 행복한 시간이 될 것이고 배부른 한 끼가 될 것이다.
빽빽하게 적힌 메뉴판의 수많은 음식보다 내 입맛에 딱 맞는 맛있는 반찬 한두 가지면 족하지 않을까? 먹지 않아도 배부른 것은 항아리라 우기고 굶어야 배가 부르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지식은 채우지 않으면 보릿고개 곳간 비어가듯 머릿속이 텅 비어가고 지혜도 늘어나지 않는다. 오뉴월 가뭄에 저수지 물 보타지듯 말라간다. 나를 살찌우는 밥은 날마다 먹어야 하고 나를 가치 있게 해주는 사람도 날마다 만나야겠지요. 오늘도 누군가를 만나서 맛있는 식사와 함께 새로운 지식도 늘리고 삶의 지혜도 살찌는 감사가 넘치는 하루를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너보다 더 많이 벌어서 배부른 게 아닌 너보다 더 많이 베풀어서 배부른 하루, 너보다 더 많이 먹어서 배부른 게 아닌 너보다 더 많이 나누어서 배부른 하루, 너보다 더 부자가 되어서가 아닌 너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었음에 배부른 하루, 너보다 더 많은 칭찬을 받아서 ‘덕분에’를 더 큰소리로 외치며 오늘 하루를 예쁘게 채우고, 내일도 나의 빈속을 채워줄 찰떡궁합의 인연을 만나 마음이 더 배부른 하루가 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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