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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마당/차용국의 걷기여행 이야기

삶의 발자국은 다 간절하고 치열하다 - 통영행

by 이치저널 2021.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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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국chaykjh@naver.com

 

삶의 발자국은 다 간절하고 치열하다

통영행

동트기 전에 서울집에서 출발하여 경부고속도로를 달린다. 이렇게 서둘러 출발해야 주말 정체에 걸리지 않는다. 옥산휴게소에서 아메리카노 아이스를 마시며 졸음을 날려 보낸다. 구름이 잔뜩 낀 동녘은 여전히 해를 내놓지 않는다. 대전 외곽을 돌아 대진 고속도로로 들어선다. 산청 휴게소에서 잠시 굳은 어깨를 풀고 냅다 달려 통영에 도착했다.

우선 배를 채우고 보자. 지인이 운영하는 식당을 네비로 찾았다. 네비가 도남동으로 안내한다. 식당 길가에 길게 늘어선 차량들이 성업 중임을 보여준다. 이미 점심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빈자리가 없다. 손님맞이에 바쁜 지인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빈자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 식당의 명품요리는 '반건조 생선구이'다. 싱싱한 생선을 반건조시킨 생선구이의 쫄깃쫄깃하고 담백한 감촉에 빠지면 수저의 손놀림을 멈추기가 힘들다. 게다가 향긋한 전복영양밥에 숭늉까지 더하면 더없이 깔끔하다. 역시 여행의 참맛 중 하나가 현지 음식 먹기 아니던가?

배도 빵빵하니 늘어지게 행복한 오후. 한숨 자고 떠나고 싶은 유혹이 파도처럼 밀려오지만 떠나야 한다. 여객선이 내 사정을 봐줄 리가 있으랴. 일단 쉬더라도 삼덕항으로 가서 출항 시간을 정하고 볼 일이다. 삼덕항은 한적하다. 게으른 바람이 멈추어 선 항구의 잔잔한 물결 위에 크고 작은 배들도 늘어져라 오수에 빠져있다. 이따금 여객선이 들어오지만 조급하지 않다. 저 홀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도시를 벗어나면 삶도 이렇게 여유로운데, 일상은 좀처럼 도시의 문을 열고 나서기가 쉽지 않다. 우리에 갇힌 삶을 꺼내 위로하며 함께 길 떠나는 일도 계획과 용기가 필요한 시대다.

욕지도행 배는 휴일이 무색할 정도로 한가롭다. 섬과 육지를 오가는 분들도 많지 않고, 여행객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연안선이 뜨면 의례 날아와 붙는 갈매기도 없다. 섬과 섬 사이에서 배가 만든 하얀 길이 거품처럼 일어났다 쓰러진다. 배를 따라오는 햇살마저 여객선 엔진 돌아가는 소리에 떠밀려 떨어져 나간다. 뭍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섬까지 기를 쓰며 따라올 마음이 없단다.

욕지도에 내려 해안도로를 따라 차를 몬다. 비록 도로는 넓지 않아도 정체도 없으니 서두를 일도 없다. 천천히 달리기도 하고, 세워놓고 경치도 본다. 파도의 거친 도전을 견뎌낸 섬은 옹이처럼 굳은 억샌 절벽 위에 푸른 숲을 펼치고 있다. 출렁다리와 같은 몇몇 시설물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이런 시설물에 익숙한 여행객들은 별 관심이 없다. 욕지도에서는 그저 바다를 바라보며 사방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을 뿐이다.

파도가 바다 위로 노을을 몰고 와 풀어놓고 있다. 숙소에서 짐을 풀고, 항구로 걸어 나왔다. 노을이 훤히 보이는 횟집에 들러 고등어회를 주문했다. 서울에서 고등어회를 먹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욕지도에서는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단다. 오늘 실컷 먹고 볼 일이다. 게다가 약간의 허기까지 겹치니 어찌 머뭇거릴 틈이 있으랴. 비린내를 쏙 빼낸 회 맛은 고소하고 담백하기까지 하다.

바다에 빠진 석양의 전령처럼 작은 어선들이 항구로 돌아온다. 식당을 둘러보니 섬사람으로 보이는 어르신 몇 분과 식당 부부가 어울려 매운탕에 술을 마시고 있고, 옆 식탁에 여행객으로 보이는 남녀 두 분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쩌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여자 분이 웃으며, ''내일 아침 배 타고 나가세요?'' 묻는다. 나는 내일 오후 배를 탈 예정이라고 대답했다. 이번엔 남자분이 ''내일 오후에는 배가 없을 게요.'' 라며, 내일 제8호 태풍 프란시스코가 온다며, 내일 오후부터는 여객선 운항이 취소된다고 한다, 아, 이 무슨 날벼락인가? 모처럼 섬 여행에 태풍이라니.

''우린 내일 07시 30분 배를 탈거요''라며, 남자가 소주병을 들고 한 잔 권한다. 그는 내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여행도 삶도 다 그런 거요. 계획대로 되는 게 어디 있겠소''라며, 계획은 바꾸며 사는 거라고 일러주었다. 그들은 남편이 교사 정년퇴직을 한 후, 섬 여행을 다니는 부부라고 소개했다. 짝꿍도 내일 그들과 같은 배를 타자고 한다. 나도 그러자고 했다. 아쉽지만 욕지도에서 맥없이 태풍을 맞으며 이틀을 죽칠 수는 없다. 월요일이면 출근도 해야 한다. 그들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왔다. 뱃소리마저 묶어 놓은 창밖 항구의 가로등만이 고즈넉한 바다를 지키는 밤이다.

고단한 삶의 항로 항구에 내려놓고

별빛에 취한 밤배 곤히 잠든 욕지도

파도 손

꼭 잡고서

지새우는 밤바다

다정한 그 속내를 바람이 모르겠나

깊은 밤 파도 소리 자장가 따로 없네

나그네

밤길 밝히는

별무리가 곱구나

(졸시, 「욕지도 바다」 전문)

다음 날 아침 욕지도를 나와 통영항에 도착했다. 욕지도를 나왔지만 통영의 날씨는 전혀 태풍이 올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우선 가까운 중앙재래시장 뒤편 언덕 위에 동피랑 벽화마을을 오른다. 동피랑이란 '동쪽 벼랑'이란 뜻이다. 이순신 장군이 설치한 통제영의 동포루가 있던 자리에 낡은 주택이 촘촘히 이어진 마을이었는데, 2007년 '동피랑색칠하기-전국벽화공모전'을 열어 낡은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관광명소가 되었다. 동피랑 벽화는 2년마다 새로운 그림으로 재단장을 한다.

중앙재래시장에서 충무김밥을 간단히 먹고 건어물과 꿀빵을 산 후 서피랑으로 간다. 서포루 언덕 아래 마을이다. 피랑은 벼랑을 뜻하는 이곳 지방말이다. 이곳 담벽에도 동피랑처럼 벽화를 그린다. 특히, 99계단을 걸어 서포루에 올라 바라보는 강구안의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예전에 이곳에는 수군통제령이 있었고 동포루, 서포로, 북포루를 잇는 통영성이 있었다. 천혜의 요새이자 아름다운 군사기지였다.

해안도로를 달려 박경리기념관에 멈추었다. 통영이 낳은 한국문학의 거장의 자취를 빼먹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1926년 10월 28일 통영시 문화동 박수영의 장녀로 출생한 박경리(본명 박금이)는 1955년 8월 김동리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계산'을 발표하면서 문학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불후의 명작 대하소설 '토지'는 1969년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해서 1994년에 완성했다. 집필기간 26년, 전5부 16권! 인생의 전부를 걸지 않고서야 어찌 이토록 경이로운 명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겠는가? 2008년 5월 5일 그는 영면에 들었지만 그와 그가 남긴 작품은 영원할 것이다. 이처럼 문학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시간 날 때 취미 삼아 하는 일이 아니라, 인생 전부를 걸만큼 간절하고 치열한 일인 듯싶다. 어찌 문학만 그러한가? 어디를 어떻게 걸어가든 삶의 발자국은 다 그러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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