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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마당/김무홍의 나를 찾아나서는 시간여행

한양도성 순성길에서 시ㆍ공을 드나들다(1) - 조선의 건국과 한양도성의 등장

by 이치저널 2022.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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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홍 gimmh54@daum.net

 

 

‘순성놀이’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도성都城과 함께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
시공을 넘나들며 살아 숨 쉬는 서울한양도성 순성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면서 보고 느끼는 역사탐방은 매우 의미 깊은 체험

 

 

 

 

서울한양도성 순성길

 
 

서울한양도성 순성길은 62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오며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자랑한다. 세계적 문화유산인 타 도시 성벽과 비교하여도 한양도성만의 탁월성이 느껴진다.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 한양도성 성곽을 한 바퀴 돌면서 변화하는 계절의 풍류를 즐기며 나름의 소원을 빌었다는 ‘순성놀이’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도성都城과 함께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래서 시공을 넘나들며 살아 숨 쉬는 서울한양도성 순성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면서 오롯이 보고 느끼는 역사탐방은 매우 의미 깊은 체험이다.

여러 사람이 때때로 서울 내사산內四山(백악산白岳山(북악산北岳山), 낙산駱山, 목멱산木覓山(남산南山), 인왕산仁王山)을 산행하거나 도심 일부를 걷는 경우가 있기에 알게 모르게 서울한양도성의 일부 구간이나마 한 번 이상 걸었던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필자의 서울한양도성 걷기는 구간별 걷기를 제외하고 전 구간 완주는 네 번째이다.

이번 탐방은 역사 기행을 목적으로 진지하게 걷는 경우라서 머무는 겨를이 잦고 중간중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양도성박물관’과 ‘한국의재발견 우리궁궐지킴이’ 등에서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나 홀로 탐방하는 방식으로 몇 차례 나눠서 진행하였다.

한양도성을 도는 시간은 산행과 마찬가지로 당일 기상과 계절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지만 보통 완주하려면 10시간은 잡아야 한다. 한 걸음 더 깊이 탐방하고자 할 경우 반복해서 답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소 더디더라도 자신의 역량에 맞게 여러 차례 나눠 걸어도 좋다. 모든 상념을 접고 계절에 따라 또는 함께 하는 일행과의 분위기마다 차오르는 정취감이 남다른 한양도성은 아무튼 걷는 거만으로도 즐거운 길이다.

 

한양도성구간/서울한양도성 제공

 

 

조선의 건국과 한양도성의 등장

 

 1392년 7월 17일, 개경 수창궁壽昌宮에서 이성계가 고려의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받아 한반도에 새로운 왕조가 탄생되었다. 같은 달 28일에 이성계는 국호는 그대로 고려高麗(이듬해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했을 때도 이성계의 직함이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史’라고 썼다.)라 하고 의장과 법제도 고려의 것을 그대로 따른다는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다.

결국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국호는 조선朝鮮과 화녕和寧 두(조선朝鮮은 단군조선檀君朝鮮과 기자조선箕子朝鮮에서 취했고, 화녕和寧은 이성계 고향인 영흥永興의 옛 이름에서 따왔다.) 개 후보를 보낸 결과 1393년 조선으로 결정되었다. ‘동이東夷(동이란 특정한 종족을 지칭하기보다는 중국의 한문화漢文化와 상대적인 문화개념의 호칭이며, 여기에서는 조선을 말한다.)의 국호는 오직 조선이라 칭한 것은 아름답고 유래가 오래되니 그 이름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라는 명나라 태조의 뜻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태조는 즉위한 지 한 달이 지난 8월 13일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기 위해 계룡산의 신도 건설을 추진했다. 하지만 배극렴 등의 반대로 주춤하다가 무학대사가 추천한 남경南京이 오랫동안 논의를 거쳐 천도의 최종 대상지로 정해짐에 따라 1394년 조선의 수도가 되었다.

 

서울한양도성 제공

 

풍수지리와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명당인 백악산 기슭에 새로운 궁궐 경복궁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맨 먼저 궁궐을 기준으로 좌측에 종묘를 우측에 사직을 지었다.

나머지 도성의 축조는 1396년 태조 5년 1월 9일부터 시작되었다. 성곽 축조에 경상, 전라, 강원과 평안, 함경도에서 차출되었는데, 2차에 걸쳐 모두 197,449명이 동원되었다. 평안 및 함경 일부는 국경의 수비를 위해 빠졌고 경기, 충청, 황해도는 이미 궁궐 공사에 동원되었기에 제외시켰다.

전체 59,500척의 성벽은 600척씩 총 97구간으로 나누고 각 구간마다 천자문을 일련번호 개념으로 순서를 붙였다. 97개의 구간은 2개 구간마다 판사判事와 부판사副判事를 각 1명씩 감역관으로 두었다.

한양도성에는 8개의 문을 세웠다. 정남은 속칭 남대문南大門이라는 숭례문崇禮門, 정동은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는 흥인지문興仁之門, 정서는 속칭 서대문西大門이라는 돈의문敦義門은 각각 주된 도로 위에 자리를 잡아 대문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숙청문肅淸門은 정북으로 도로가 아닌 백악산 자락으로 통하도록 하였다. 그밖에 동북 문에는 홍화문弘化門, 동남 문에는 광희문光熙門, 서남 문에는 소덕문昭德門, 서북 문에는 창의문彰義門이라고 불렀다. 현재 돈의문과 소의문은 소실되었다.

도성 밖으로 물길을 원활하게 배수하기 위해 청계천 주변에 오간수문五間水門과 이간수문二間水門을 두어 홍수 조절 등의 재해 방지에 힘썼다.

1396년 9월 24일에 한양도성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농사 기간과 장마 등을 빼면 실제 공사 기간은 98일 만이다.

한양도성은 수도 한성부와 지방의 경계를 정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만들었다.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전체 길이가 9970보로 기록되어 있어 환산하면 18.6km이다. 수도권의 여러 걷기 동호회에서 GPS 등으로 실측한 거리는 27km 이상이라는 점에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치면 한양도성의 전 구간은 70리에 해당한다. 조선 시대 세종, 숙종과 순조 때 개축하였으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많이 훼손되었다.

한양도성은 축조 후 514년간 조선왕조와 마지막까지 운명을 같이하였다.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랜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양도성에는 우리 역사 전체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고대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축성기술과 성곽 기능을 지속할 수 있게 발전하고 계승하였다. 특히, 조선 시대의 성벽 축조의 변천 과정 및 보수 보강을 시대별로 보여주고 있어 성벽을 한 걸음 한 걸음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특별한 문화 체험이다.

 

-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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