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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마당/김무홍의 나를 찾아나서는 시간여행

조선왕조 진산의 베일을 벗기다[1] - 옛 모습 그대로, 옹골찬 창의문

by 이치저널 2022.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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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홍gimmh54@daum.net

 

방향타 없이 치달았던 한여름의 질주가 멈추고, 여름 끝자락을 붙들었던 가을장마마저 그치고 나니 하늘이 몹시 맑고 산뜻해졌다. 이제 코스모스 위로 고추잠자리가 날아다니고 귀뚜라미가 합창하는 계절의 전령사들은 가을을 노래한다. 서울 하늘 아래 묵직한 시간이 내려앉은 한양도성에도 정녕 가을 향기가 채워진다.

인왕산의 고도가 바닥을 치다가 북악산으로 도약하는 시작점에 한양도성 걷기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백악 구간의 관문이 등장하는데, 다름 아닌 자하문紫霞門의 또 다른 이름인 창의문彰義門이다. 서울 한양도성의 북서쪽에 자리를 튼 창의문은 사소문四小門 중 하나로 1396년 한양도성의 다른 문과 함께 축조되었다. 규모는 자그마하지만 매우 옹골차고 굳건한 기풍을 자랑하며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창의문 전경/한국관광공사 제공

 

창의문 현판 문루에는 1623년 인조반정 당시 거사에 가담한 반정 세력이 이 문을 통하여 들어온 사연과 공신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창의문 밖으로 나가면 백석동천과 백사실계곡(백사白沙 이항복의 별장터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자연환경이 잘 어우러진 우수한 자연생지역으로서 다양한 생물체들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1급수 지표종인 '도롱뇽'은 보호야생동물로서 백사실계곡에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어 그 보존 가지가 매우 높은 지역이다.), 세검정, 대원군 별장이었던 석파정의 사랑채, 홍지문弘智門(탕춘대성의 성문으로 1715년 조선 숙종 41년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보완하기 위해 세운 문이다. 지금의 건물은 1921년 홍수로 허물어졌다가 1977년 오간대수문과 함께 복원한 것이다. 한북문이라고도 부른다.), 보도각백불(서울시 서대문구 옥천암에 있는 고려 시대에 조성된 높이 4.83m, 무릎 폭 3.44m나 되는 대형의 마애보살좌상이다. 불상 전면에 흰색 호분으로 칠해져 있어 ‘보도각백불普渡閣白佛’로 불린다. 다른 이름으로 ‘마애보살좌상玉泉庵磨崖菩薩坐像’이라 한다. )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사대문四大門 중에서 북대문인 숙정문이 닫혀 있었으므로 경기도 양주 등 북쪽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문을 거쳐야 했다.

한산한 창의문안내소에서 풀어 제쳤던 여장을 주섬주섬 챙긴다. 한때 이곳에는 입산하고자 줄 선 탐방객들로 꽉 찼던 시절이 있었다. 1968.1.21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남한에 침투한 이후 창의문안내소에서 말바위안내소까지 민간인의 출입이 전면 통제하였다. 2006년에 이르러 출입을 허용하였으나 인원을 한정하고 규제가 따랐다.

그래서 현장에서 사전 예약을 확인하며 일일이 신분증을 대조하는 등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장사진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이후 단계적으로 규제를 완화하다가 2019.4.5부터는 신분 확인 없이 출입이 자유로워졌다. 오늘따라 너른 휴게소에는 탐방객들의 발길이 거의 그친 데다가 구름 한 점 없는 텅 빈 가을 하늘이 더해져 분위기가 휑하다. 장소를 불문하고 아무 때나 가공할만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전횡이 이곳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한양도성 창의문안내소

출발부터 서서히 고도를 높이다가 이내 돌고래쉼터에 이른다. 맞이해 줄 탐방객이 뜸해서인지 바람마저 한산하다. 한때 이곳을 오르내렸던 일들이 추억으로 소환되어 알알이 꽂힌다.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 서로를 도닥도닥 쓰다듬어주며 위로받았던 평범한 일상이 어쩌다가 옛일이 되어버렸지만, 한양도성의 수려한 자태는 그대로이다.

돌고래쉼터 / 한양도성 제공

백악산 정상까지 거리가 짧은 관계로 가파른 경사는 필연이다. 짜릿한 얼음물로 목 한번 축여놓고 깔딱 계단을 마구 넘으라는 짓궂은 성화가 계속된다. 계단 하나마다 흘린 땀방울을 발로 지르밟으며 수를 세듯 오른다. 밟은 흔적을 헤아릴수록 호흡이 짧아지고 세기가 거칠어진다. 이곳 백악 구간은 경사가 급한 만큼 형세는 매우 수려한다. 게다가 성곽의 보존이 가장 뛰어난 곳이다.

한양도성 제공

두 해 전 한여름 젊은 문화해설사의 숨 가쁜 해설을 들으며 함께 오른 적이 있었다. 설명이 이어지다가 한양도성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관한 뒷이야기로 화제가 귀결되었다. 2017년 14명으로 구성된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의(ICOMOS: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한 유적을 조사 및 평가하는 비정부기구이다. 세계유산위원회의 자문기구 중 하나로서 110여 개국 문화유산 전문가 7,000여 명이 세계문화유산 관련 업무를 수행한다.) 패널 심사 과정에서 한양도성에 대해 등재 불가(Not to inscribe) 판정을 내려 결국 등재 신청을 철회하였다는 것이다.

심사의 주안점은 유적의 진정성, 완전성, 보존관리계획을 비롯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 등이었다. 다른 요건은 충족하지만, 성벽 주변이 훼손되고 일정 구간이 단절되었다는 점이 불거진 관계로 한양도성이 갖는 보편적 탁월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발목이 잡혔다.

한양도성 제공

원인은 1899년 돈의문과 청량리 간 전차 개통과 함께 한양도성의 수난이 시작되어 소의문 제거, 돈의문 매각에 이어 도성 구간에 일제의 조선신궁과 경성운동장 등이 들어섬으로써 훼손과 단절을 가일층하였다. 요즘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각국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추세에 따라 심사가 엄격해진다고 한다. 문화재청에 의하면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 불가로 결론이 나면 해당 유산의 재신청 자체가 불가능해지므로 부득이하게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는 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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