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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마당/염홍철의 아침단상

마담 보바리

by 이치저널 2023.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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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는 걸출한 작가들이 많이 탄생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빅토르 위고, 이에 대비되는 발자크가 양대 산맥을 이룬 가운데 그 자리에 플로베르라는 작가가 파고들었지요. 플로베르는 앞의 두 사람보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소설 이름을 들으면 금방 알 수 있는 사람이지요. 그가 쓴 소설은 <마담 보바리>입니다. 이 소설이 유명해진 것은 풍기 문란과 종교모독죄로 기소가 되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무죄판결이 되었지요.

마담 보바리에서 보바리는 늘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열망합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환상에 사로잡혀 살다가 끝내 파국으로 치닫고 말지요. 플로베르는 밑바닥까지 떨어진 보바리를 놓아주지 않고 철저하게 몰락시키는 ‘냉혹한 현실’을 부각합니다. 여기에서 ‘보바리즘’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지요. 보바리즘은 사람이 자신을 지금의 자신과 다르다고 믿는 능력입니다. 환상을 자아내는 일종의 병이지요. 이것을 ‘낭만주의적 몽상’이라고도 합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 어떤 매개도 없이 현실 자체를 변질시키고 외면하게 만드는 시대적 정신 질병이지요.

 

 

보바리보다 160년 후에 사는 오늘날 우리의 삶은 어떨까요? 사회 전반에 배금주의, 학벌 만능 그리고 미모지상주의 등은 우리에게 늘 지금의 나를 부정하고 더 멋지고 훌륭한 나를, 허상으로라도 만들 것을 주문하지요. 많은 사람이 이러한 세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플로베르가 ‘엠마 보바리는 바로 나 자신’이라고 토로했듯이 어쩌면 보바리즘이란 현재의 만족스럽지 못한 삶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안쓰러운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막연히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닌 것 같고 좀 더 조명받을 기회를 갈구합니다. 그러나 딱히 특별한 어려움도 없는 평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지요.

제가 오늘 이렇게 보바리를 소환하는 것은 많은 사람이 자신을 돌이켜 보며 내가 왜 지금, 여기서, 일하고 있나 하는 자괴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이 일을 하는 것은 어느 시인이 지적한 것처럼 ‘잃은 것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욕망과 환상으로 꽉 차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많은 것은 잃고 삽니다. 겨울의 한 가운데서 잃어버린 안타까움을 반추해 새로운 나를 찾는 겨울을 만들지 않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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