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말이라 정리할 게 많아 사무실 근처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려고 허름한 한정식 식당을 찾았었다. 그런데 식당 입구에서 안쪽을 바라다보는 벽면에 ‘내 탓 네 덕’이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식당 주인의 마음 씀이 예사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맛있게 먹었으면 ‘네 덕’이고 배가 덜 부르면 ‘내 탓’ 아니겠는가. 일이 잘못되면 탓할 거리를 찾아 남에게 돌리고 일이 잘되면 공치사 거리는 내 덕으로 삼으려는 세상인데, 이런 세상 물정과 정반대로 마음을 크게 쓰고 있는 사람도 있구나 하면서 ‘덕분에, 때문에, 탓’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았다.
‘덕분(德分)’은 베풀어 준 은혜나 도움을 긍정적으로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이며, ‘덕택(德澤)’, ‘덕’이라는 단어도 함께 사용한다. 그 사용 예를 보면,
‘일등한 덕분에 큰 성취감을 맛보았다’, ‘엄한 선생님 덕분에 학교생활을 무사히 잘 마쳤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장님 덕분에 좋은 구경 했습니다’, ‘제가 성공한 것은 모두 OO 덕분입니다’. ‘걱정해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 덕분에 더욱 아름다워지고 착한 사람들 덕분에 더욱 착해지며 정의로운 사람들 덕분에 정의가 유지됩니다’. ‘강물을 막은 댐 덕분에 큰 물난리를 피했다’. ‘훌륭한 가문 덕분에’, ‘좋은 친구 덕분에’ 등등
‘때문’은 어떤 일의 원인이나 까닭을 말하며 긍정과 부정의 의미에 모두 사용할 수 있다.
‘너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 ‘그만저만한 내가 일등을 했기 때문에 질투하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그놈의 빚 때문에 죽도록 고생했었다’.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는 하냐’. ‘내가 기쁜 것은 네가 오기 때문이다’. ‘불의 사나운 성질 때문에’. ‘서툰 손재주 때문에’. ‘머리숱이 많이 빠졌기 때문에 동년배들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인다’. ‘여름휴가는 폭우 때문에 다음 달에 가기로 했다’. ‘잘생긴 외모 때문에 결혼했다’. ‘네 말 때문에 집을 못 사 폭망했다’. ‘OO 때문에 피할 수 없었다’. 등등

‘탓’은 주로 부정적인 현상이 생겨난 까닭이나 원인을 나타내며, 구실이나 핑계로 삼아 원망하거나 나무라는 경우가 많다. ‘바람’이라는 단어도 가끔 쓰인다.
‘죽기 살기로 일등 하려 한 탓에 좋은 친구를 더 많이 사귀지 못했다’. ‘이번 사고는 순전히 내 탓이다’. ‘그는 급한 성격 탓에 나와 충돌이 잦았다’. ‘어제의 실수는 술이 과한 탓이다’. ‘잘되면 내 덕 못되면 조상 탓을 한다’. ‘만난 기억이 전혀 없었던 탓에 분위기가 서먹서먹했다’. ‘왜 이게 내 탓이야?’. ‘밤마다 야식을 찾는다고? 그 이유는 위 탓이 아니고 뇌 탓인 것 같다’. ‘들고양이가 내 차 앞으로 갑자기 뛰어드는 바람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등등
‘○○ 때문에’, ‘○○가 잘못한 탓에’, ‘○○씨가 일을 엉망으로 하는 바람에’, 이런 말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하고 자주 듣는 말이다. 이러한 말 습관은 내 탓도, 네 탓도,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잘되면 내 덕, 못되면 남 탓’하려는 사람의 본성과 세상 풍조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조건 탓’은 어떤 일이 잘못됐을 때나 그 일을 하기 싫을 때,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일의 성공 여부는 모두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는데 모두 남 탓만 하는 것이다. 남 탓이라 외치는 사람은 넘쳐나는데 내 탓이라 말하는 사람은 씨가 말라가고 있는 것은 현실 아닌가. 어쩌다가 열 개중 하나 잘되면 모두 내 덕이라 말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덕분에’라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내 주변에 항상 좋은 일이 일어난다. ‘때문에’라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불평불만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말이 거칠면 생활도 마음도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 말이 씨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거친 말이 넘쳐나는 데에는 ‘나’ 역시 책임이 있음에도, 먼저 ‘내 탓이오(Mea Culpa)’라고 말하지 않고, 오로지 상대방의 흠을 찾고 상대방이 잘못한 탓이라 억척스럽게 우기려 하기 때문이다.
허대중 시인의 <네 덕 내 탓> 이라는 시를 옮겨 본다.
‘내 탓이오 하고 나를 보니 / 내 자신이 어찌 그리 자랑스럽던지. / 남을 탓한 지난날은 겁쟁이 시절 / 나를 탓하고 나니 / 내가 이렇게 커지는 것을 //
네 덕이요 하고 그를 보니 / 그 사람 어찌 그리 사랑스럽던지. / 나만 세운 지난날은 욕심쟁이 시절 / 공(功)을 돌리고 나니 / 이렇게 큰 부자가 되는 것을 //’
심리학에서는 여럿이 일을 할 때 그 일이 성공하면 다 ‘내 덕분’이라며 공을 독차지하려는 반면, 일이 실패하면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해 잘못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려는 사고방식을 ‘베네펙턴스(beneffectance) 현상’이라고 한다. 인간의 뇌는 성공하면 그 공을 자신에게 돌리고 실제보다 더 큰 일을 해낸 것처럼 확대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반대로 실패할 땐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솔직하게 ‘내 탓’임을 인정하기보다 ‘네 탓’으로 떠넘기는 ‘내 탓 없는 사회’로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일이 잘되면 자기가 잘해서이고, 잘못되면 남의 탓, 이웃 탓, 사회 탓, 환경 탓, 조상 탓으로 돌린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주변 사람들이 잘못한 탓이라 말한다. 때로는 ‘미안합니다. 라고 말하면서도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어쩔 수 없었습니다’라며 열심히 변명하기도 한다. 이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여전히 주변 탓을 하는 것이다. 나쁜 인연 탓이라 할지라도 그 인연이 숙명적인 인연이라면 그것조차도 ‘네 덕분이다’라고 외쳐보자. 그러면 참 좋은 인연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일이 잘못되면 상대방에게서 핑곗거리를 찾아내는 것에 천재의 머리를 가졌다. 대형 참사가 발생하면 사건 해결은 둘째치고 그 원인을 두고 ‘네 탓 공방’을 일삼는다. 그러면서 일분일초의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사건 해결 책임자들이 ‘내 책임이 아니다’ 하면서 ‘네 탓’만 하는 것이다. 이들의 ‘네 탓 공방’은 사고 현장에 갇혀 있는 사람과 그들의 가족과 지인, 그리고 신속한 사태 해결을 바라는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떤 일이 잘못될 때마다 남 탓만을 외치면 개선과 변화의 기회를 얻기 어렵다. ‘남 탓 문화’는 자신의 잘못이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내가 책임질 일도 아니며, 그래서 변화하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빈손으로 옆집 잔치에 낯을 내려고만 하는 사람들, 어지간히도 두꺼운 낯이 아닌가. ‘네 탓에서 내 탓, 내 덕에서 네 덕으로’ 가는 길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인지도 모른다. 부정적인 일은 모두 내 덕이 부족한 내 탓이고, 긍정적인 일은 네 덕이라 말하면 한평생 무적(無敵)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진정 모른다는 것인가?
‘덕분에’를 외치다 보면 내가 잘난 것이 없는데도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진다. 그 덕분에 성공과 행복이 따라온다. ‘ 때문에’는 모든 것을 남의 탓이라 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흉을 보면서 흩어진다. 실패를 자신 탓이라 인정하지 않기에 원망 미움 불행이 끊이질 않는다. 내 탓이라 말하면 병나는 줄 안다. 잘못되면 오로지 남 탓만 노래할 뿐이다. 머리는 닭 볏처럼 달고 다니는 장식품이란 말인가?
세상을 살다 보면 ‘네 탓’처럼 보이기도 하고, 확실히 ‘너 때문’인 경우도 있다. ‘고양이 덕과 며느리 덕은 느끼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만,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고, ‘내 덕이 아니라 네 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배려하고 칭찬하는 마술이 정말 필요한 시절이다. ‘야 너 때문에 망했잖아’. ‘네 탓이 아니면 누구의 탓이란 말인가?’라는 말들을 좀 줄여가면 좋겠다.
동네에서 축구를 하다 보면 공이 있는 곳에 선수들이 모여있다. 프로선수들의 축구경기를 보면 공을 받을 곳에 선수가 서 있다. 여하튼 공을 따라 선수들이 뛰어다닌다. 둥근 공을 공(功)이나 덕(德)으로 바꾸어 생각해보자.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 : 덕을 베풀면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이란 말은 공짜로 생긴 말이 아니다. 어쨌든 공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게 되고 공을 나누어 주고 덕을 베푸는 사람은 그 공을 반드시 되돌려 받게 된다는 것은 불멸의 진리다.
‘나’는 나를 내세워 만족해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나로 인해 행복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인가? 어느 누군가로부터 ‘당신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라는 고백을 듣는다면 행복한 인생이 아니겠는가. 좁은 골목길 반대편 방향에서 다가오는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이 먼저 몸을 피하게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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