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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마당/송란교의 행복사냥

내가 하는 말은 소통일까? 소음일까?

by 이치저널 2024.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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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등 뒤 어깨 쭉지 밑이 가려우면 내 손이 잘 닿지 않아서 다른 사람 손을 빌려야 하는 경우가 있다. ‘조금만 더 오른쪽으로 아니 위쪽으로 더 더 더’ 이런 식으로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속이 터진다. 내 육신의 가려운 부분을 콕 찍어서 긁어주지 못한다고 신경질을 부린다. 내 살이 아니고 내 몸이 아닌데 다른 사람이 내 몸의 속사정을 어찌 속속들이 알 것인가? 그렇게 잘 안다면 그 육신은 누구의 육신이란 말인가?

열심히 설명했는데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짜증이 나는가? 이런 상황이 되었다면 목석(木石)에게 독백을 한 것인가 소통을 한 것인가?

적들이 몰려오니 도망가라 하는데 앞으로 나가 싸우려 덤비려 하고, 아무도 없다고 앞으로 나아가라 하는데 뒤돌아서서 도망가려 한다. 떠나가라 하는데 가까이 다가오고, 오라 하는데 멀리 도망간다면 분명 쌍방 간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몸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무시하거나 거꾸로 해석하다 나중에 큰 병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저수지 댐도 물이 새는 흔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때에는 호미로 막을 수 있겠지만 나중에는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이처럼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신호를 보내는데도 이를 통째로 무시한다면 이는 극심한 불통이라 할 것이며, 종국에는 대가를 크게 치러야 하고 쓰라린 고통이 뒤따르게 된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개구리는 옆에 있는 하루살이를 보고 하루 종일 ‘개굴개굴’하면서 시부렁거린다. 말인지 막걸린지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도 모르면서 오랫동안 대화를 했으니 서로 소통이 잘 되었다고 개굴개굴 말한다.

말하기 연습하듯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부었으니 속마음은 개운하다는 것이겠지요. 듣는 사람이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공감은 하고 있는지가 소통의 기본일 텐데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들어주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다 하면 된다는 오해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똑같은 말임에도 나는 이런 뜻으로 말하는데 듣는 사람은 저런 뜻으로 오해를 하게 된다. 소통 없는 대화 느낌 없는 대화는 공감 없는 소음일 뿐이다. 같은 말이라도 공간이 다르면 내 뜻과 달리 오해를 일으킬 수도 있다. 상대하는 사람이 달라져도 그렇다. 그러므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세심한 관심이 있어야 느낌이 통하는 대화가 가능하게 된다. 좋은 대화는 좋은 느낌을 불러온다. ‘관계’는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고 ‘소통’은 ‘말’을 통해 이루어지며 ‘말’은 ‘마음’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옷 가게 바로 옆에서 기존 건물을 헐고 새로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굴착기 돌아가는 소리, 쇠파이프 구르는 소리, 쿵쿵 기둥 박는 소리 등등. 덤으로 그 옆에 있는 마트에서도 할인판매 한다는 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싱싱한 생선을 지금 사면 가격을 20% 깎아준다’는 소리다. 옷 가게 사장은 마트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유난히도 싫어한다. 그러면서도 공사장 소음은 참을만하다고 말을 한다. 정말 그럴까? 어쩌면 옷 가게 사장은 그 공사장에서 짓고 있는 건물에 투자한 사람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마트에서 싱싱하다고 외치던 생선을 샀는데 집에 와서 보니 영 딴판이었을지도 모른다.

낮잠 자려는 사람에게는 공사장의 소음이 큰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자신에게 돈이 되는 소리라면 그 큰 소리가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 자장가 소리로 들릴 것이며, 소리가 크면 클수록 돈이 더 벌린다고 하면 덩달아서 함께 악을 쓰려 할지도 모른다. 나에게 조금이나마 손해를 끼치고 나를 괴롭히는 말들은 모기들의 합창 소리 마냥 귀를 막게 하고 얼굴을 찡그리게 하는 소음으로 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배고파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소음인가 소통인가? 우는 아이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에게는 조용한 사색을 방해하는 달갑지 않은 소음일 뿐이다. 그러나 그 아이의 엄마한테는 아주 소중한 소통의 신호다. 젖을 물려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이처럼 낯익은 사람에게는 소통할 수 있는 아름다운 소리도 낯선 사람에게는 의심이 필요한 소음이 되는 것이다. 내 이익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사람과 다른 사람이 잘못되어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 간의 생각의 차이만큼 소통과 소음은 그렇게 경계가 지어질 것이다.

 

‘그 사람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래? 뭐가?’. ‘그게 뭐냐면 진짜 좋은 사람이야’, ‘그래서 뭐가 좋은데?’. ‘그냥 정말 좋아. 깜짝 놀랐어. 정말 좋은 사람이라니까’. 이런 식의 대화는 길어질수록 힘이 빠지고 상처를 받는 경우가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러다가 엉뚱하게도 ‘왜 그렇게 생각이 없어, 뭐가 좋다는 거냐고?’라고 한마디 덧붙이면 싸움밖에 더 일어나지 않겠는가? 내 생각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의미 없는 중얼거림에 그칠 뿐이고 그만큼 불통과 고통의 시간은 길어질 것이다.

 

소통(疏通)은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이고, 뜻이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다. 공감(共感)은 대상을 알고 이해하거나, 대상이 느끼는 상황 또는 기분을 비슷하게 경험하는 심적 현상을 말한다. 사람들이 말을 하는 것은 소통과 공감을 위해서다. 긍정적인 언어로 말하고, 적절히 공감하고, 열린 마음으로 듣고, 자신감 있게 질문하다 보면 소통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소통의 도구는 말뿐만 아니라 태도, 표정, 몸짓 모든 것이 포함된다. 나와 생각이 완전히 다른 사람일 경우 표현방식도 달리해야 한다. 잘 아는 사람끼리 하는 말의 뜻과 그 사람이 하는 말의 뜻이 크게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하는 말의 참뜻을 똑바로 이해하고서 내 생각을 상대에게 정확하게 전달해야 오해 없는 소통이 이루어진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뜻,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상대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면 공감과 소통은 실패하게 된다. 하지만 마음을 열고 경청하고, 내 의도를 명확히 전달하고, 상대방의 입장으로 생각하고, 말투와 표현을 부드럽게 한다면 어느 순간 소통의 달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다면 누구의 잘못일까? 어떤 말을 해야 마음이 통할까? 상처 주기 싫다고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라는 뜻으로 대화를 포기해버린다면 그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드는 기회는 끝내 다가오지 않는다. ‘할말하않(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은 불통의 시작이다. 만약 상사로부터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돼요?’라는 말을 들으면, ‘그러는 당신은 얼마나 잘해서?’라고 공격할 것인가? 아니면 ‘나는 왜 이 모양이지’라며 자신을 책망할 것인가? 마음이 갈지(之) 자면 행동도 갈지자가 된다. 갈지자로 걸으면 다른 사람과 부딪히기 쉽다. 다가오는 상대와 눈빛을 교환하고 리듬을 맞추어 움직이면 다행스럽게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갈지자로 걸을 것인가 똑바로 걸을 것인가는 ‘나’의 말과 생각이 결정한다.

 

‘ㄱ’을 보고 ‘ㄴ‘ 이라 읽고, ’나‘를 ’너‘라고 읽는 사람들은 내 편이 ‘ㄱ’ 이라 말하면 ‘ㄱ’ 이라 알아듣지만, 경쟁자가 ‘ㄱ’ 이라 말하면 ‘ㄴ’ 이라 악의적으로 오해를 하면서 ‘ㄱ’이 아니고 ‘ㄴ’ 이라 우긴다. 같은 말을 하는데 소통이 안 된다. 똑같은 말인데도 ‘내 편’이 말하면 귀에 순하고, ‘네 편’이 말하면 귀에 거슬린다. 내 편에게는 박수를 치고 상대편에게는 욕설을 내뱉는다. ‘어제 했던 말’과 ‘오늘 한 말’이 똑같은 데도 뜻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어제는 이 말이 맞았다 하고 오늘은 이 말이 틀렸다 한다. 뜻이 조변석개(朝變夕改)이면 소통은 어렵게 된다.

소통의 기본은 말의 뜻이 같아야 한다.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편에 따라 뜻이 갈리면 ‘내 편 말 사전’, ‘네 편 말 사전’, ‘우리 편 말 사전’이 따로 필요하게 될 것이다. 중국에서는 같은 글자이나 지역에 따라 발음의 차이가 한국어와 일본어만큼 크게 달라 통역이 필요하지만, 글자가 지닌 뜻은 하나다. 그래서 필답(筆答)을 하면 소통이 가능해진다. 같은 글자임에도 뜻이 다르다고 통역이 필요하다면 이미 말의 뜻이 쪼개진 것이고 마음도 생각도 쪼개진 것이다. 관자(管子)는 목민편(牧民篇)에서 ‘범언이불가복, 행이불가재자, 유국자지대금야(凡言而不可復,行而不可再者,有國者之大禁也 : 되풀이하지 못할 말이나 두 번 다시 못할 행동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매우 삼가야 하는 것), 언실만실 언당만당(言室滿室,言堂滿堂 : 안방에서 말하면 그 말이 안방의 모든 사람에게 미치고, 마당에서 말하면 마당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라고 주장했었다. 말의 뜻이 이중적이지 않고 정확하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해를 줄이고 소통을 더 잘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싫은 티를 팍팍 낸다면 다른 사람도 싫어한다. 내 맘이 너그러워야 상대의 마음도 너그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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