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항만 변천사
우리나라 항만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경제발전의 든든한 뒷받침
세계 물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는 계기, 중요한 해운국가로 부상
항만과 더불어 세계 최대의 선박 건조국가, 세계 4대 액체화물 항만
들어가며
우리가 흔히 기간산업이라고 말할 때 도로, 철도, 댐, 공항, 항만을 망라한 개념으로 말한다. 그중 국내 경제 상황 및 국민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도로, 철도 등 시설들은 국민의 인지도와 관심도가 높지만, 항만은 국내경제 상황보다는 해외의 경제상황에 따라 항만 취급 물동량, 항만의 개발 동향 등이 좌우되어 그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는 경향이 있어 왔다.
그러나 항만은 육지와 바다를 연결하며 해외와 국내의 물류를 연결하는 접점(接點)에 있기 때문에 국가경제에 있어 그 무엇보다는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간 우리나라의 경제 및 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하여 왔다. 실제로 항만의 물류가 일 주일만 멈추어 선다면, 그에 대한 파급력은 도로나 철도의 파업 못지않은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경제는 내수보다는 해외와의 무역에 72% 이상을 의존하고 있으며, 그중에서 수·출입 물동량의 99.7%가 항만을 통해 처리되고 있다. 이렇듯 중요한 항만에 대하여 시대별 변천 및 발전과정을 알아보도록 하자.
일제강점기부터 50년대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탈했을 때, 제일 먼저 수탈의 대상이 된 곳은 우리나라 대표 항만인 부산과 인천, 원산항이었다. 일본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발판으로 부산, 인천, 원산항을 개항하여 침략의 교두보로 활용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항만개발 및 운영에 대한 업무는 조선총독부에서는 총괄하였으며, 일제강점기 말(1943년)에 이르러, 부산항에는 1, 2, 3, 4 부두가 개발되어 1만 톤급 선박(L=132m)이 접안할 수 있는 대형부두가 건설되기도 하였다. 2019년 부산항에 입항한 2만3천 TEU급(L=400m) 컨테이너선이 접안한 항만시설과 비교해 봤을 때 소규모 접안시설이었지만 당시에는 대단히 큰 항만시설이라 할 수 있었다.
6.25 전쟁 중 부산항은 이 시설을 바탕으로 유엔군의 전쟁물자를 운반하는 병참기지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인천항과 월미도는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했던 역사적 현장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항만은 요란스럽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항상 묵묵히 뒤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국가경제의 버팀목이 되어왔다.
하지만, 6.25 전쟁 이후 항만시설은 90% 이상 피해를 보았으며 전후복구를 위하여 파손된 항만을 시급하게 복구하는 것이 큰 과제였다. 이에 전후 복구와 더불어 경제발전을 위한 시대적인 요구에 따라 항만개발 업무도 1948년에 처음으로 교통부의 해운국과 상공부의 수산국에서 담당하였으며, 그 후 해무청이 신설(‘55)되어 교통부와 상공부에서 처리하던 항만개발 및 운영업무를 일원화하게 되었다.
60-70년대
60년 초에는 6.25의 빠른 전후복구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기초를 다진 시기이다. 5ㆍ16 이후, 군사정부의 기구 개혁 시 해무청이 없어지고 수산업무는 농림부로, 해운업무는 교통부로 다시 이원화되었으며, 그 이후 ’66년에는 수산청이 신설되었고, ’77년에는 교통부 해운국과 건설부 항만시설국이 통합되어 지금의 해양수산부의 전신인 해운항만청이 출범하게 되었다.
또한 60년대 초부터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본격적인 경제발전이 추진되었으며 그 일환으로 울산을 특정공업지구로 지정하고 조선, 자동차, 석유화학의 3대 트로이카 산업거점 지역으로 육성하게 되었으며, 울산항은 이를 뒷받침하는 지원항만으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포항신항은 당시 중화학공업 중점육성 정책에 따라서 건설된 포항종합제철(現 포스코) 지원항만으로 개발되었으며, 같은 시기 거제 옥포항과 함께 미포항은 조선공업단지를 지원하는 중추 역할을 하였으며, 여수지역에서는 화학공업단지를 지원하는 삼일항(현 여천항)이 조성되었다.
항만건설 재원으로는 대부분 아시아 개발은행(ADB) 차관과 세계은행(IBRD), 사우디아라비아 차관(SFD)을 도입하여 진행되었으며, 세계에서 6번째, 동양에서는 최초로 인천항에 도입된 대형갑문식 선거 건설도 해외차관을 도입하여 추진되었다. 또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인천항에 한진 민자부두를 건설(‘74)하여, 부두의 건설과 운영을 민간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항만개발방식이 도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70년 말 이란혁명을 계기로 산유국들이 석유생산을 대폭 감축함으로써 제2차 석유파동이 발생하였으며, 이 시기 석유 대신 석탄이라는 대체 에너지원을 원활하게 수송하기 위해 인천항과 목포항에 석탄부두를 착공하기도 하였다.
항만정책 분야에서는 ’67년에 항만의 개발과 관리를 체계화 할 수 있는 “항만법”이 제정(‘67)되어, 항만개발 및 운영을 활성화하기 위한 기반을 만들었다.
80년대
80년대 초 우리나라 항만 분야의 목표는 선박의 대형화에 대비한 대형부두건설과 고부가 가치의 컨테이너 전용부두 건설에 역점을 두었다. 이 시기에 부산항에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부두인 자성대부두(‘83)를 완공하였으며, 그 후에 신선대컨테이너 부두, 오륙도와 조도의 방파제, 감천항 개발 등 현재 부산항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인천항, 포항신항, 동해항(북평항), 온산항, 평택항, 여천항 등 공업항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서해안 시대에 대 중국교역 전진기지 조성을 위해 대불산업기지, 군장산업기지, 아산산업기지를 추가 산업단지로 지정하였고, 그런 정책에 맞추어 목포항, 군산항, 평택항이 관련 산업의 지원항만으로 개발되었다.
이 시기에 대형 항만건설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대형선박 동시 접안능력도 263척에서 421척으로 급속히 증가하게 되었으며, 항만이 관련 산업발전에 큰 기여를 한 시기이기도 하다.
90년대
90년대 항만의 목표는 항만 적체 현상 해소와 권역별·기능별 거점 항만개발, 컨테이너 전용 부두시설의 확충이었다. 이 시기에 전국 항만의 체계적인 개발계획 수립과 향후 항만분야 발전 방향의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전국항만의 기본계획 수립을 위해 항만법(‘91)에 개정되었고, 그 법안에 따라 전국단위의 “제1차 전국 무역항 기본계획”이 처음으로 수립(‘95)되었다.
2020년에 이르러 “제4차 전국 무역항 기본계획”까지 총 6번에 걸친 기본계획이 수립되었고, 항만의 국내 산업지원이라는 본래 기능은 물론 국민에게 안전한 친환경 항만시설을 제공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시기에 부산항에만 집중되어 적체되던 컨테이너 물량을 분산하기 위해 양항 체제가 도입되었으며, 광양항을 제 2컨테이너 부두 중심항으로 개발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컨테이너부두공단(’90)을 설립하여 국내 컨테이너 항만시설의 개발 및 관리·운영을 일원화하였으며, 이로써 정부 재정 지원의 한계를 극복하고 투자재원 조달의 다변화를 통해 컨테이너부두를 적기에 개발·확충할 수 있는 제도개선을 하게 되었다.
90년대 초, 우리나라 컨테이너 부두 운영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는 세계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는 바, 이것이 바로 일본의 동북부 고베 대지진(‘95)이다. 일본 고베항은 일본 3위에 해당하는 컨테이너 전용 항만이었고, 당시 부산항과 경쟁 관계에 있었으나 대지진으로 인해 4개 항만이 패쇄되고, 3,300척의 선박 피해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부산항은 고베 대체항으로 급부상하여 컨테이너 물동량이 폭증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부산항의 컨테이너 물동량이 한때 세계 3위 자리를 차지하는 기록을 남기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90년대 하반기에는 우리나라 주요 거점별 신항만 개발을 신속하게 추진하기 위해 각종 인허가 사항을 간소화하고 인근 산업 지원과 항만 활성화를 위해서 “신항만촉진법”을 재정(‘97)하였다. 그에 따라 부산항 신항, 인천신항 등 10개 신항만을 지정하였고, 권역별로 관련 산업들을 지원하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장 큰 변화는 항만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항만공사법을 제정(‘03)하게 된 것이다. 항만공사가 설립되면서 정부 주도의 항만 행정에서 오는 경직성을 해소하고, 항만환경의 급속한 변화에 대한 탄력적인 대처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부산항에는 부산항만공사(BPA), 인천항에는 인천항만공사(IPA), 울산항에는 울산항만공사(UPA), 광양항에는 여수광양항만공사(YGPA)등 항만별 민간 주도의 전문성을 갖춘 항만공사가 탄생하였다.
또한, 도시 인근의 노후화된 항만의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여가활동을 증대할 수 있는 쾌적한 공간으로의 수요에 부응하여, 기존의 노후 또는 유휴화된 항만 공간을 재개발 할 수 있는 “항만과 그 주변지역의 개발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을 제정(‘07)하게 되었고, 이로써 본격적인 항만재개발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항만 재개발 사업이 부산 북항 재개발 사업이며, 인천 영종도, 인천내항, 동해․묵호, 고현항 등에서도 현재 재개발 사업이 추진 중이다. 이 사업을 계기로 노후화된 혐오시설이 인근 주민과 함께하는 친수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될 것이다.
또한 해양관광과 도서 주민의 생활 편의를 위한 국제 및 연안 여객 부두, 쿠르즈 전용부두 및 마리나항 개발, 수변 친수공간(water front) 개발 등 국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해양레저공간 개발 사업들이 본격 추진되고 있다.
맺음말
우리나라 항만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경제발전의 든든한 뒷받침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항만은 우리나라 경제 및 산업발전과 함께 급속도로 개발되었고, 산업발전 지원이라는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여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계 속에서 우리나라 항만의 위상도 많이 달라졌다. 과거 물류의 변방에 머물던 우리나라 항만은 세계 물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중요한 해운국가로 부상하고 있다. 또한 항만과 더불어 세계 최대의 선박 건조국가, 세계 4대 액체화물 항만과 같은 화려한 타이틀도 가지게 되었다. 우리의 항만은 지금껏 그래왔듯이 항만인의 노력과 열정을 더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우리나라 기업의 전초기지 역할을 할 것이며, 묵묵히 경제발전을 지원하는 지원군 역할을 수행 할 것이다.
참고자료 : 2016년 항만편람
'건설.창조 > 김영복의 항만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력적인 해양도시를 꿈꾸는 고현항 (0) | 2022.02.14 |
---|---|
매력적인 해양도시를 꿈꾸는 고현항 (0) | 2022.02.14 |
한려수도를 품은 통영항 (1) | 2022.01.12 |
방재개념 도입한 마산항 정비 (0) | 2021.10.05 |
서해안의 신 산업벨트 대산항 (0) | 2021.08.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