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연doyeonlee3@navet.com
죽녹원 초록 대나무들은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를 모르는가보다 일직선으로 획을 그르며 곱게 뻗어 올라간 대숲에서는 선비의 고고한 절개가 느껴진다. 곱게 뻗어 올린 직선이 때로는 죽창이 되기도 하고 활과 화살이 되어 생과 사의 갈림길을 갈랐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숲에 가면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슬픈 울음소리가 바람 속에 잠겨 있다.
울음 끝에 매달린 많은 사연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을 터이지만 그래도 대나무는 스스로 악기가 되어 깊은 공명의 울림으로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도 하고 사람들의 손때 묻은 살림 도구가 되기도 하며 한겨울 북풍한설을 막아주는 훌륭한 방풍림이 되었다. 숲의 지평 위로 대순이 나오는가 싶으면 어느 사이 쑥쑥 자라나 마디를 한 걸음씩 키워내 서로 이파리를 부딪치며 어깨를 나란히 의지해 커다란 대숲을 이룬다.
대숲에는 다양한 소리가 난다. 이파리에서는 서걱거리며 날카롭고 뾰족한 잎 사이를 관통하는 청량한 소리가 난다. 하지만 대나무끼리 부딪치는 소리는 둔탁하고 소소한 울림의 여운이 묻어나는 깊이 있는 소리를 품고 있다. 두 소리는 서로서로 감싸 안아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며 하나의 조화로움으로 태어나 대나무 마디마디에 소리의 혼을 불어넣었으며 저마다 다른 울림과 빛깔을 지닌 공명 소리는 대숲에서 영혼의 소리로 고여 있다.
마디 속 비어 있는 공명 소리 저편에는 아직 정재 되지 않은 소리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나 장인의 손길을 거쳐 날라리가 되고 퉁소가 되면 소리의 완성은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선비의 절개를 통해서 명명(明鳴)으로 울려 퍼지고 대나무 마디에 고통의 구멍을 뚫어 피리로 거듭나면 고통의 통로를 여닫음으로 인해서 드디어 화음의 울림으로 변신을 한다.
모든 악기는 나무의 울림과 금속성의 울림, 현의 공명을 위한 소리통을 가지고 있다.
대숲의 또 다른 완성은 매, 난, 국, 죽의 수묵화에서 일어난다.
수묵의 검은색이 선과 면으로 맞닿아 이어질 때 여백의 미로 거듭나며 비어 있는 공간 속에서 초록 빛깔을 지닌 대숲으로 변신을 한다. 화선지의 빈 풍경 속으로 대나무 마디마디가 힘차게 뻗쳐올라갈 때 그 여백은 이미 검은색이 아니고 살아 꿈틀거리는 소리의 울림을 간직한 공명하는 소리통으로 변신한다. 사람의 모든 시선을 집중시키는 대나무 숲은 비어 있지만 아득한 울림을 가진 거대한 소리의 통로인 것이다.
수없이 숲을 채운 대나무 들이 일제히 바람을 타고 일어나면 새로운 공명 소리를 향해서 수선스러운 바람을 일으키고 대나무의 육질은 단단하고 그 속은 비어있어 청아하고 간결한 피리의 애절함으로 태어나는 것처럼 사람의 본성 속에도 피리의 이치와 다르지 않다.
비어 있어야 채움이 가능하고 비어 있는 울림의 공간에서 비로소 맑고 고운 울림 소리가 나는 것이다. 비움의 공간이 넓고 깨끗할수록 소리의 빛깔은 청아하고 그 소리의 울림이 아름다울수록 많은 사람과 함께 공감하고 행복할 수 있다.
죽녹원 대숲에 시원한 지혜의 바람이 분다.
사각사각 공명의 선율로 흔들리고 꿈꾸는 욕망을 잠재우는 소리가 숲 전체의 울림으로 번져 간다. 드넓은 대나무 숲의 면적이 크면 클수록 대나무 속 공명 개수는 늘어만 간다.
완성되지 않은 숲은 숲이지만 숲이 아니고 악기이되 아직 악기가 아니다.
자연의 이치와 함께할 때 숲이 되고 장인의 숨결로 고통의 통로를 여닫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악기로 태어난다. 사람이 그러하듯이 무한한 소리의 바다인 대나무 숲에서 청량하고 맑은 울림의 가능성을 본다.
인간의 본성도 소리의 바다로 통하고 끝없는 비움을 배워 새롭게 채우고 또 다른 비움을 통해서 새로운 소리, 맑은 소리를 낼 수 있는 공명의 소리통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대숲을 바라보며 맑고 단아한 기운을 느끼며 싱그러운 이파리와 부러지지 않는 단단한 절개가 흐르는 아름다운 공간을 호흡하며 폐부 깊숙이 공명의 소리통을 부풀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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