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문화에 대한 즐거움이 ‘창의성’의 원천. 서로 다른 것에 매력을 느끼고, 서로 다른 문화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을 때 사회는 더욱 발전한다.
칭기즈 칸이 세계를 정복했다면, 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민족, 지역, 종교를 뛰어넘는 포용과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민현상과 다양성은 세계적인 트렌드이자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 서로 차이가 있지만,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70km만 벗어나면 테를지 국립공원에 이른다. 테를지 국립공원은 원시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어 여행자들이 자연의 신비와 매력에 깊이 빠져들곤 한다.
수도 울란바타르와 테를지 국립공원은 ‘같음과 다름(sameness and difference)’을 보여준다. 테를지 국립공원에서 도심지로 가는 길이 ‘같음’을 향한 길이라면, 테를지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은 ‘다름’을 지향한다. 테를지 국립공원은 다양함이 가득하다. 바위들은 각자의 모습을 뽐내고, 나무와 숲, 초원 위의 길조차도 다양하다. 온갖 모양과 색채 속에 조화로운 자연의 모습이 경이롭기만 하다.
반면 테를지에서 도시로 돌아오는 차창 밖은 하나, 둘…. ‘같아지려는 인간의 모습’이 엿보인다. 테를지의 맛깔스런 길은 어느새 삭막하고 딱딱한 콘크리트 길로 변해 있고, 같은 모양의 가로수와 사각 빌딩이 도시 숲을 이룬다. 그리고 빌딩마다 비슷한 얼굴의 미남미녀가 북적거린다. 서울의 강남도 별반 차이가 없다. 사람들은 왜 이처럼 같아지려 하는가?
차이와 공존 (詩 : 길 강 묵)
각기 다른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고
각기 다른 구름들이 모여 하늘을 이루고
각기 다른 게르(GER)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는데
우리는 왜 서로 같아지려 하는가
몽골이 13~14세기에 소위 ‘팍스 몽골리아’로 일컬으며 유라시아에 걸쳐 동서 문화·경제교류를 왕성하게 이끌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인구 100만 명, 군사력은 고작 10만 명으로 남송까지 정벌 후, 중국을 100년간 다스리며, 동서를 평정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바로 ‘다양성’이다. 쿠빌라이 칸이 다양성이라는 플랫폼으로 몽골제국을 통치한 것은 세계사에서도 의미 있게 평가된다.
칭기즈 칸이 세계를 정복했다면, 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민족, 지역, 종교를 뛰어넘는 포용과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가 건국한 대원(大元)에는 몽골인 장군, 중국인 유학자, 티베트 라마승, 이슬람 상인, 중앙아시아 천문학자, 유럽의 기독교 선교사 등으로 붐볐고, 쿠빌라이 정부에는 몽골인을 비롯 중앙아시아, 중국, 위구르, 티베트인들이 모여 있었다. 각계각층의 차이와 차별을 넘는 통합으로 더 큰 이익이 창출되었다. 문화분야는 어떠했을까. 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민족과 문화에서 몽골 고유의 문화와 풍습을 강요하지 않는 유연한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한편 쿠빌라이가 몽골의 뿌리를 지키려 했던 노력도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여러 언어와 민족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통‧번역사를 두면서도 한편으론 1265년 공용 몽골어(Phags-pa script)를 만들었다. 또한 중국의 전통적인 대도성을 축조하였지만 이를 비워둔 채, 정원에 몽골전통 가옥(게르, GER)을 짓고 거주하는 등 몽골 유목민의 정신과 삶의 본질을 지키고자 했다.
다양성을 두고 첨예한 논쟁은 없었을까. 다양성 인정과 존중을 중시하는 진보, 몽골중심주의를 강조하는 보수가 건전한 토론을 하며 함께 공존하였기에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다방면에서 문물교류가 융성하게 이뤄졌다. 비단길, 초원길에 이어 서양의 ‘대항해시대’의 바닷길이 열리고,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렸다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쓰인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오늘날 몽골은 어떠한가. 몽골은 현재 『외국인관리법』에 따라 외국인의 수가 몽골 전체 인구의 1%를 넘지 않도록 제한한다. 국제관계 속에서 넓은 영토와 긴 국경선, 적은 인구를 고려한 조치일 것이다. 시대가 변하여 쿠빌라이 칸의 통치는 역사 속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이민사회로 나아가는 우리에게 의미있는 교훈을 시사한다.
우리나라는 2020년 초, 외국인·이민자 260만 명을 넘어섰으나, 팬더믹으로 200만 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민현상과 다양성은 세계적인 트렌드이자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우리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낯선 문화에 대한 즐거움이 바로 ‘창의성’의 원천이다. 서로 다른 것에 매력을 느끼고, 서로 다른 문화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을 때 사회는 더욱 발전한다. 그래서 로마 제정기의 시인인 플루타르크(Plutarch)는 “내가 끄덕일 때, 똑같이 끄덕이는 친구는 필요 없다. 그런 건 내 그림자가 더 잘한다.”라고 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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