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랭이 마을의 꿈

가천마을 다랭이 논은 국가 지정 명승 제1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산간 지방에서 벼농사를 짓기 위해 설흘산과 응봉산 비탈을 깎아 만든 계단식 논으로 바다를 향해 물 흐르듯 나아 있는 능선 위에 곡선의 결을 따라 백여 개의 층으로 일구어 산과 바다와 자연이 어우러진 모습으로 농촌 문화 경관이 수려한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 형성된 삶의 예술품이다.
인간이 자연과 함께 일구어 온 걸작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비탈은 바다로 내려서고 급경사의 좁은 땅에서는 농부의 헐겁고 가난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조급한 마음과 수확의 결실을 위한 꿈을 꾸지만, 땅과 바다의 경계는 너무나 비좁아 농부의 마음은 산으로 바다로 땅을 넓혀도 수직의 세상은 하늘에 메이니 다랭이 마을 농토의 부피는 농부의 꿈처럼 더 이상 높아지기도 낮아지지도 않았다.

오늘도 노을이 지는 언덕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 능선을 붉게 물들이지만 농부와 함께 늙어 버린 소를 몰고 쟁기질하던 시절의 언덕을 지금은 털털거리는 경운기가 쟁기를 달고 구름처럼 높은 산자락 논에서, 밭에서 깊은 주름을 내며 가을 밭갈이가 한창이다.
사람들은 코발트색 바다를 보며 환호하고 섬과 섬 사이에 고독하게 떠 있는 무인도를 향해 사진을 찍으며 자연을 찬미하고 남해의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행복해하지만, 여행자의 눈에 비치는 다랭이 마을의 논과 밭은 농부가 힘겹게 오르는 농토가 아닌 자연이 빚어낸 풍경이며 그냥 그렇게 펼쳐진 바다와 사람 그리고 비탈이 빚어 놓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이곳의 풍경을 사진으로 눈으로 마음으로 담으려고 노력하며 나 또한 그들과 다를 것 없이 영혼 없는 마음으로 풍경을 담아내고 즐거워한다.
다랭이 마을의 주름진 얼굴이 가파른 벽에 기대어 하늘을 본다. 노을이 스미는 바다와 하늘 위로 가을 기러기가 군무를 그리며 줄지어 이동을 한다.
기러기의 대오가 다랭이 마을의 곡선과 잇대어 창공을 선회하고 다랭이 논밭도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기러기의 꿈을 꾸며 창공으로 날아오른다.
시베리아로 가는 기러기의 궤적은 어디로 인가 떠나야 하는 삶의 여정과 바다를 넘어 대륙을 횡단해야 하는 그들의 견고한 어깨와 비상하는 힘줄의 완고함은 실로 놀라운 현실이며 나의 비좁은 어깨로 등 푸른 생선같이 파란 가을하늘을 따라 이 땅의 반도를 종단해 내려온 빈약한 날갯짓에 비하면 철새가 가지고 있는 태고의 유전자는 비교할 수 없는 우성의 유전자이다.
탁월한 그들의 비행술을 지탱할 수 있는 원천인 날개는 하늘을 날고자 했던 인류의 오랜 꿈과 대랭이 마을의 희망에 비하면 강철같이 단단한 날개로 하늘을 지배하고 있다.
다랭이 마을 선조들은 비탈의 동토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티 없이 맑은 어린 자식들의 눈동자를 보면서 배고픔과 무지의 삶을 떠나 다랭이 논 계단을 밟고 높은 산 정상을 향해 날아가는 철새의 꿈을 꾸지 않았을까?
그러하듯 이곳에서 낭만과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이방인들의 몫이고 이곳의 농부와 어부들에게는 치열한 삶의 주름진 현장일 뿐이며 앞바다에 떠 있는 노도에서는 조선조 문신으로 한글 <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저자인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로 그는 산비탈의 다랭이 논을 바라보며 뭍으로 귀환하기를 꿈결처럼 희망했을 것이다.
대륙의 끝에서 바다와 맞서 뜨거운 해풍과 척박한 설흘산과 응봉산 비탈에 펼쳐진 아름다움과 위태로움이 공존하는 논밭은 옛 선조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자 다랭이 마을의 꿈과 삶의 사투로 얼룩진 시간이 만들어 놓은 간극의 물결이며 농부의 주름 같은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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