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은 감동
계절은 이제 굳이 백로나 추분의 절기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어서 반소매가 서늘하고 시원한 아침 가을바람이 제법 차게 느껴진다.
수인선 열차의 긴 행렬 끝에서 코스모스가 가는 허리를 한들거리며 여행을 떠나자고 유혹 하고 달리는 기차의 끝에서는 향기로운 가을바람이 잔뜩 실려와 승차장에 흩어놓고 달아난다. 여행객의 마음은 들뜨는 마음에 뭉게구름 두둥실 저마다의 작품을 만들기에 한창인 파란 물빛 하늘이 눈부시게 빛나는 가을을 향해 어디론가 달려간다.
수인선 열차는 지난 1920년 9월 12일 인천에서 수원을 잇는 52.8km 구간이 완전한 개통을 했다. 이로써 인천에서 수원을 가려면 구로에서 환승해서 가야 하는 불편을 덜고 90분가량 걸리던 구간이 55분 정도로 단축이 되어 수도권 서남부지역의 교통이 크게 개선이 되어 길과 사람을 좀 더 가까이 이어 놓았다.
폐선된 소래철교 위를 벌벌 떨며 건너가면서도 즐거워하던 수인선과 소래포구의 어린 시절 추억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기억은 추억을 만들고 추억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나 보다. 우리나라 마지막 협궤 열차로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가 전매국을 만들어 소래 염전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천일염을 모두 일본으로 실어가 생필품은 물론 전쟁을 위한 화약 제조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던 수탈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후에는 인천 수원 간 두 칸짜리 꼬마열차가 서민의 애환을 싣고 흔들흔들 덜컹거리며 달리다 수인선이 패선 되면서 소래 염전의 과거 명성은 사라지고 폐허로 남아 있다. 현재는 염전 자리에 소래습지 생태공원이 조성되어있으며 복원된 수인선은 25년 만에 광역철도로 다시 탄생하게 되었다.
25년 만에 새롭게 탄생한 수인선 철도 위로 날렵하게 제비 한 마리가 날아간다. 마침 승차장으로 물 흐르듯 들어오는 열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차는 빠르고 날렵한 제비처럼 현대식으로 바뀌었지만, 소래포구와 오이도, 안산, 수원에 이르기까지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구간마다 지나는 산과 들의 풍경은 여전히 아름답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도시와 시골의 풍경은 여유로움이 가득하며 그 옛날 수인선의 추억을 떠오르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수인선 덕분에 빠르게 달려온 수원의 공기는 수년 전에 머물던 추억 때문에 과거로 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웅장하게 변한 역 청사와 수많은 차량과 건물들이 이곳의 발전을 실감하기도 했지만, 근대문화 건물과 성곽을 바라보니 오래된 고도의 향기가 이끼처럼 묻어난다.
많은 사람의 인파를 헤치고 역사를 나오자 마침 승강장에 화성행궁 방향 버스가 들어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가 자리를 잡자 십여 년 전 허름한 시장 골목 선술집에서 순댓국에 막걸리를 마시고 좁은 나무 의자에 앉아 잔치국수로 허기를 달래던 남문시장을 지나 팔달문 로터리를 돌아 십 여분 만에 행궁 앞에 도착했다.
아침 열시에 집을 나서 행궁동에 도착하자 시침은 벌써 정오에 머물러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고기와 싱싱한 채소를 곁들인 쌈밥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단아하고 기품 있게 지어진 수원전통문화관 사랑 안채 한옥 카페에서 달달 쌉쌀한 카푸치노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길을 나선다.
성곽과 어우러지는 도시의 아름다움과 멋스러움이 느껴진다. 정조대왕 어가가 행차할 것 같은 정조로 한복판을 성곽 투어용 화성어차가 화려한 단장을 하고 지나간다. 220년 전 왕이 만들었다는 수원 남문시장을 끼고 팔달문에서 이어지는 정조로는 공방과 음식점 문화예술 근대문화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아름다운 행궁 길과 공방 거리와 수원에 오면 꼭 먹어 봐야 한다는 통닭 거리를 지나 좌측으로 정조의 어가가 머물던 화성행궁이 있고 정면으로 장안문으로 이어진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 들고 웅장한 모습의 장안문의 돌계단을 오르자 넓은 대청마루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이마에 땀을 식혀준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자기 집 대청에서 쉬고 있는 듯 편안하고 한가로운 정취를 즐기며 앉아있거나 누워서 휴식을 즐기고 있다.
장안문(長安門) 느티나무에서 출발하여 화홍문(華虹門)까지 구간에 한참 보수 중인 빛의 산책로를 지나 높은 성곽 위에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섬세하게 지어진 동북각루(방화수류정, 訪華隨柳亭)의 모습을 감상하면서 육간수문의 시원한 물줄기를 따라 물길 위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넌다. 길은 맑고 푸르며 풍경은 가을 속에서 더욱더 생동감으로 빛이 난다. 고색창연한 성곽을 휘돌아 쾌청한 날씨와 무르익어가는 가을의 향기 속에서 곱게도 펼쳐져 있다.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과 연꽃의 어우러지는 풍경 속에 각종 수생 식물이 아기자기한 작은 호수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 속에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지는 성곽의 능선을 따라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사이 눈앞에 넓은 시야 속에 들어오는 잔디밭과 그 위에 한옥 건축의 미를 한껏 자랑하며 세련된 팔작지붕이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펼치고 있는 동장대(東將臺)와 연무대가 보인다. 연무대 앞으로 푸른 하늘 끝까지 날아오른 연들이 장쾌한 모습으로 바람을 타고 노닐다 춤추며 비상하고 있다. 정조대왕이 전각위에 서서 장용형의 호위무사와 병사들의 훈련 모습을 바라보며 왕권 강화와 부국강병의 꿈을 키웠을 이곳에서 대왕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은 감동과 때마침 시원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타고 연무대 아래 국궁장에서 날아오르는 활시위가 시원하게 과녁을 가른다.
견고한 성곽과 능선 위에 세워진 장대의 위용은 하늘에 닿아있고 성곽 주변에 잘 정돈된 산책로는 멋스럽고 아름다워 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건축물을 조성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면서 수원성을 설계한 조선후기 최고의 실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약용(丁若鏞)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으며 공사 감독을 맞은 채제공(蔡濟恭)의 노고를 더듬어 본다.
성곽을 돌아 내려와 홍살문을 바라보며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豊樓)에 들어선다. 신풍루 앞 광장에 왕과 장수, 무장들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 보인다. 언제가 드라마에서 보았던 조선최고의 무사 백동수(白東脩)가 생각나며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와 함께 편찬한 무예훈련 교범인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무예24기를 정조를 호위하던 장호용 병사들의 무술을 전수 받아 신풍루 광장에서 재현하는 상설공연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안으로 들어선다.
안채에는 남군영, 서리청, 비장청 등 업무를 관장하던 전각이 있고 왕의 임시처소인 봉수당(奉壽堂)에서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그리워했을 정조의 마음을 만나 볼 수가 있으며 미로한정(未老閒亭)이라 청사초롱 빛을 따라 올라가면 나비가 노니는 후원과 도시와 어우러진 고궁이 내려다보이고 달빛 쉼터인 낙남헌(洛南軒)에서는 달빛으로 어우러지는 고궁을 감상할 수 있으니 이 어찌 아름다운지, 한 걸음 나아가 보물 2035로 지정된 화령전(華寧殿)은 19세기 건축 양식의 화룡점정이라 정조의 어진을 만날 수 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화성행궁에서 달빛 사위는 가을날의 꿈이 깊어만 간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수원화성의 아름다움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대왕의 효심과 개혁정치의 상징이며 의지이다. 백성을 향한 어진 군주로서 그가 만들고자 했던 세상과 정조대왕의 기획 도시인 수원화성은 그의 나이 49세에 완공된 이듬해에 그의 꿈과 함께 세상을 떠나 잠들었다.
동안 만날 수밖에 없었던 수원화성과 정조대왕을 흠모하는 나의 마음도 속절없이 흐르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아침 이슬처럼 스러져 사라지고 말았으며 수인선 끝에서 만난 수원화성은 과거의 시간을 달려와 오늘과 내일을 완성해가는 나의 인생 정점에서 또 하나의 쉼표와 마침표를 찍으며 오늘 하루 뜻 깊은 귀로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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