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영혼의 소리가 존재하는 그리움의 밤바다
바다를 바라보다 바다에 취해 술을 마셨다.
바다는 언제나 추억을 준비하고 있었고 또 다른 과거를 만들어 내고 있었으며 바다는 언제나 과거형이다.
파도 소리와 함께 밀려온 술잔 위에 붉은 달이 떠 있어 술잔에 비친 얼굴도 붉게 물들어 가고 있다.
알싸한 바람이 비릿한 바다를 따라 옷깃 사이로 빠르게 스쳐 지나갈 때면 붉은 달빛이 길을 낸 해안선이 파도에 반짝이며 바다 위로도 길을 만들어 놓았고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따라 휘적휘적 두 팔을 흔들며 나아간다.
정해놓은 길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달빛은 점점 붉어지고 붉어진 얼굴이 이제는 가슴으로 내려와 온몸은 이미 붉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차라리 붉은 달을 만나지 말 것을 진즉 취해버렸으면 달은 붉게 물들지도 않았을 터이고 붉은 길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을!
촤르르 철썩 눈보다 소리가 먼저 바다를 알아본다. 철썩이고 펄럭이는 검은 바다 위에 점점이 하얀 파도가 달빛에 부서진다.
수평선의 경계는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어서 모호하고 다만 검은 바다는 깊은 그리움만이 아련하게 밀려오고 있다.
밤바다를 바라보며 느끼는 애잔하고 사무친 그리움은 별다른 수식어가 필요치 않아 바다의 시인 청마 유치환의 시가 아니더라도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를 외치고 싶다.
바다는 그런 마음을 이해하려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무심한 파도만 밀려온다.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청마)
"
사랑에 목말라 보고 싶은 여인이 간절히 그리워질 때 미동도 하지 않는 여인을 그리며 무심한 바다를 본다.
애가 타는 마음으로 외쳤을 그 소리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바다를 만나기 전까지는!
단발마의 단순한 외침 속에 들어 있는 애절함과 간절함을 몇 뼘의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에야 이해할 것 같다.
그러나 그 안타까운 마음의 대상이 꼭 여인만이 아닐 수도 있다.
살며 부대끼며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방황하던 수많은 순간에도 파도를 향해 어쩌란 말이냐 무수히 외쳤을 절박한 외로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서 어디선가 곰살맞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귀를 기울여 보라. 무심하고 한결같이 밀려오는 파도소리도 마주한 사람의 심경만큼이나 변화무쌍하다.
행복한 사람에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해풍에 실려 오는 부드러운 음악처럼 들리고, 슬픔에 싸인 사람의 파도 소리나 분노에 찬 사람의 파도 소리는 저마다 다른 울림으로 들려오며 각자 영혼의 소리가 존재한다.
검은 밤바다에 밀리고 밀려오는 파도는 윤회의 파도이며 소리는 그리움에 사무친 영혼으로 다가와 바다에 서 있으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별빛은 현실의 경계를 넘어가고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빈 공간을 물들여가며 밤바다는 파도 속으로 서서히 기울어 간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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